한밤중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거대한 예인선이 소형 어선을 들이받았다. 조업중이던 어선은 침몰했다. 장어잡이 그물을 놓다 날벼락을 맞은 선원 8명은 한꺼번에 바다에 던져졌다. 선원들은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부유물을 붙잡고 물위에서 사투를 벌였다. 안개 속이었으나, 목소리가 들렸고 일부는 눈으로 식별 가능했다. 원래 예인선은 속도가 느린 배다. 멈춰 주기만 했으면 전원 즉시 구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고를 알면서도, 가해 선박은 눈 딱 감고 도주해 버렸다. 사고를 낸 당직 사관도, 보고를 받은 선장도 8명의 목숨을 바다속에 내팽개친 채 태연히 계속 항해했다. 심지어 사건이 외부에 노출될까 봐, 사고 직후 부하 선원들에게 무전 사용중단까지 지시했다.

바다 위에서 사투를 벌이던 8명은 다행히 실종 11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것도 한국 배가 아닌, 지나가던 외국상선에 의해서. 그 사이, 가해 선박은 완전범죄를 꿈꾸며 항해를 계속했고,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증거인멸을 위해 충돌 부위를 도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구조된 선원의 신고로 전원 체포되었다.

바로 엊그제 남해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피해자들의 분노에 찬 표현대로, 그 가해 선박의 도주는 분명 `살인행위'이다. 내가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이것이다. 최고책임자인 선장과 당직 사관이야 그렇다 치자. 그 배 안에 있던 다른 많은 선원들은 어떻게 그처럼 쉽사리 그 무서운 범죄에 동조해 버릴 수가 있었을까.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는 집단범죄의 파렴치한 공모자들이 되고 말았다.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선장과 가해 선원들을 `인면수심'이라고 표현했다. 인간 탈을 쓴 짐승이라니? 혹 진짜 짐승들이 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행동한다. 그게 자연의 이치이자, 조물주의 뜻이기도 하다. 짐승은 인간과 달리, 순전히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타자를 속이거나 거짓말하거나, 이용하지 않는다. 탐욕 때문에 침략하지도, 전쟁을 벌이지도, 갈취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짐승들에겐 부끄러움이나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이유도, 필요도 당연히 없다.

부끄러움과 양심은 실은 같은 말이다. 그것은 인간만의 속성이자,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그는 불구의 인간이거나 괴물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러기에, 맹자도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군자가 지녀야 할 최상의 덕목 가운데 하나로 꼽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즈음 세상은 당최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는 판이다.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이미 전방위적인 질병이 된 듯하다. 케익상자, 사과박스, 차떼기는 불법 정치자금과 공천 장사의 상징 기호가 되었고, 사회의 양심이어야 할 검찰·경찰 역시 줄줄이 뇌물사탕이다.

세금포탈에 주가조작, 불법 상속의 소굴이 된 대기업들, 실험결과를 조작 발표해 한때 국민적 영웅, 세계적 학자로 추앙을 받은 과학자까지, 실로 가지가지다. 한데, 놀랍게도 비리 범죄는 많아도, 책임을 자인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잘못은 당이 했고, 회사가 했고, 조직이 했을 뿐, `내'가 한 건 아니라고 하나같이 당당하게 소리친다.

그러고도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치판에 다시 나와 책상 땅땅 두들기며 한껏 근사하게 호통 치고, 회장입네 사장입네 위풍당당하게 군림하는 광경 따위야 질리도록 봐왔다.

어디 그들 만이랴. 세금 내지 말자고 똘똘 뭉쳐 위력시위하는 부자들, 기득권세력들, 세금포탈 고수인 고소득 자영업자, 아파트 가격 올리기 담합 경쟁에 나선 주부님들, 하다못해 보험금을 노린 가짜 교통사고 입원환자들까지…, 지금 부끄러움을 모르는 함량미달 인간들로 하여 세상은 넘쳐난다.

/임 철 우(소설가·한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