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목숨을 앗아간 잠실 고시원 화재사고의 원인이 해당 건물 지하 노래방 업주 정모(52)씨의 우발적인 방화로 잠정 결론이 내려지면서 정씨의 방화 동기와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22일 브리핑에서 "정씨가 3층 고시원에 사는 여자와 사귀고 있는데 최근 잘 만나주지 않은데다 장사도 잘 되지않아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다"며 어긋난 애정관계가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씨는 불을 지른 뒤 밖으로 나왔다가 창문을 통해 구조를 요청하던 최씨의 모습을 보고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최씨 등을 구해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정씨 행적과 방화 동기 =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1978년 결혼해 가정을 꾸려오다 1994년 이혼한 뒤 혼자 살아왔다.
정씨는 작년 7월 자신의 노래방이 있는 건물 3층 고시원에 사는 최모(39.여)씨를 고시원 실장 박모(52)씨의 소개로 만나 사귀게 됐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최씨에게 현재까지 1천500여만원을 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최씨는 정씨의 노래방 일도 가끔 도와주며 1년여 동안 내연관계를 유지해왔으나 19일 화재 사고가 나기 약 보름 전부터 정씨와의 만남을 피했다.
최씨는 이와 관련, 경찰에서 "돈을 더 빌려쓰고 싶은데 직접 말하지는 못하겠고 만나주지 않으면 돈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도 최근 영업이 잘 되지 않던 노래방을 아예 처분하고 이 돈으로 최씨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잘 팔리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혼 뒤 전처와 매달 3~4차례 왕래해온 정씨는 사건 당일에도 전처와 만나 술을 마신 뒤 노래방에 돌아가 최씨에게 3차례 전화를 걸어 "지금 계단으로 내려와라"며 만나줄 것을 부탁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자 홧김에 방화를 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취중에 충동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정씨는 노래방 소파에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불이 크게 번지자 정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정씨는 자신이 지른 불로 인해 3~4층 고시원 거주자 등 20명의 사상자(8명 사망, 12명 중경상)가 발생하자 "화풀이로 불을 질렀지 사람을 다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지금 죽고싶은 심정이다"고 때늦은 후회를 하며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다.
◇ 불지른 뒤 구조 나서기도 = 방화를 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 정씨의 눈에 띈 것은 3층 창문을 통해 "살려달라"고 외치는 최씨의 모습이었다.
비록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최씨였지만 위기에 처한 광경을 목격하자 마침 근처에 놓여있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최씨를 포함해 고시원 여성 거주자 2명을 구해냈다.
정씨는 19일 참고인 조사에서 "노래방 소파에서 잠을 자다가 밖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와 여자 2명을 구조했다"고 밝혔지만 말의 앞뒤가 맞지 않고 혈중 알코올농도 0.108%로 취한 상태라는 점 때문에 신빙성이 없는 진술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씨는 경찰에서 정씨가 자신을 구한 것이 맞다며 "정씨는 내성적이고 양순한 성격의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안 만나주니까 최근에 술을 계속 마셨다"고 구조 사실을 확인해줬다.
이에 대해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의 곽대경 교수는 "방화라는 것은 마음 속의 과격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외부로 표출하는 것인데 이번 경우는 여자와의 긴장관계 속에서 생긴 좌절감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곽 교수는 또 "불을 지를 때는 얼마나 큰 피해가 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상황에 따라 엄청난 인명 및 재산피해를 낼 수 있는 범죄행위다. 방화가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범죄인지 인식을 하지 못한 것 같다"며 이씨가 범행 직후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구조활동에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경찰 수사방향 = 22일 새벽 정씨로부터 자백을 받아낸 경찰은 곧바로 이날 오전 잠실동 고시원 건물에서 1차 현장조사를 벌여 범행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23일 현장검증을 벌이는 등 보강수사를 통해 정씨의 범행 내용을 정리한 뒤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정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경찰은 또 노래방을 포함한 고시원 건물이 화재보험에 가입돼 있다는 점에서 보험금을 노린 고의방화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건물주가 4억원짜리 화재보험을, 고시텔 주인과 정씨가 각각 1억원과 1억4천만원짜리 보험을 들어놓은 것으로 파악됐다"며 "보험금을 노린 범행인지도 앞으로 수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그러나 이 고시원 건물이 관련 법규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인명피해를 키웠는지 등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건축법과 소방법 분야의 전문가 자문을 구해 건물주나 고시원 업주의 입건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고시원 불' 노래방주인 홧김 방화
입력 2006-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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