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조선(북한)과 중국 국경지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단둥(丹東)에서 천지(天池)까지는 압록강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천지에서 방천(防川)까지는 두만강을 따라 흐르는 여정이었다. 행여 경계의 끝에 서면 새로운 눈이 트일까 설레며 나선 답사길이었다.

그러나 국경은 평온했다. 미사일 후폭풍의 긴장도, 곡창지대 물폭탄의 슬픔도 아직 거기까지 닿지 않은 탓이었을까. 중국측 강변에는 관광객을 노리는 돈독 오른 장사치들만 설쳤고, 강건너에서는 별 표정없이 빨래하고 헤엄치며 일상을 꾸려가는 북녘 동포들이 드문드문 보였을 뿐이다.

저 백두산 아름드리 원목이 둥실둥실 떠내려 다녔다던 압록강은 그저 고만고만한 남쪽 강을 연상시켰다. 두만강엔 푸른 물도 노젓는 뱃사공도 보이지 않았다. 무산철광 등지에서 거르지 않고 쏟아버린 시커먼 물만이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내려갔다. 헤엄은커녕 그냥 걸어서도 한달음에 건널 수 있을 듯한 압록강, 두만강 상류에서 탈북행렬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수많은 앞선 답사자들이 고백한 것처럼, 저 강을 `잠입탈출'의 혐의 없이 자유롭게 건너다닐 수 있었으면 하는 난데없는 욕망이 불끈거리기만 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한덩어리'라던 함석헌 선생의 깨우침이 새삼스러웠다. 남쪽 농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들녘엔 한여름 햇볕이 강 이쪽저쪽을 가리지 않고 내리쬐고 있었다. 국경의 끝에서 맛볼 수 있을 법한 신선한 느낌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저 작은 강들이 어찌 경계이랴 싶은 의문만 머릿속을 뭉게구름처럼 채웠다. `여기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라는 식의 민족감정이 전혀 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런 상념들이 따라왔다. 모든 경계는 인위(人爲) 아니던가.

저 경계를 누구나 자유로이 넘나들 수 없는 한 동북아시대는 허구다. 한반도의 평화도 그럴듯한 수사에 불과하다. 이런 감상은 조-중-러 삼국 접경이라는 방천에 이르렀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방천의 전망대에 오르면 두만강 철교와 러시아쪽 핫산역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7년전 쯤 저 핫산역 뒷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두만강 철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었다. 언젠가 저 철교 너머 경흥 땅에서 철교의 앞면을 찍고 말리라. 그러나 그 때 그 결심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이번엔 핫산역과 철교를 배경으로 중국령에서 사진을 찍고 있구나.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했다. 나의 앨범은 언제쯤 완성될 수 있을까.

그 복잡한 방정식의 해답을 누가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으랴. 누구는 마지막 숨통까지 조여야된다 하고 누구는 반대로 저들을 시장(市場)에 빠뜨려야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교류와 협력의 점진적 확대라는 구도는 실패한 미사일 몇 방에 삽시간에 설 자리를 잃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압록강과 두만강에 놓인 10여개의 다리 중에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중국 화룡과 북의 무산철광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무산으로 철광석 가루를 실으러가는 중국측 덤프트럭 수십대가 줄을 지어 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북이 자체의 힘으로는 철광석을 내다팔 능력도 없기에 중국에 채굴권을 넘겨준 탓이다. 조-중 무역의 확대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얼핏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차량의 꼬리를 더듬으며 서운하고 아쉬운 눈길을 거두기도 어려웠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북의 홍수피해 기사를 읽었다.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 곡창은 이번 비에 90년대 이래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래도 남은 신속한 복구가 가능하지만 앞으로 북은 치명적인 식량난을 또한번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옌지(延吉) 공항으로 향하기 전 버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신의주 출신 10대 꽃제비의 얼굴이 그 기사 위로 떠올랐다. 새로운 눈은 뜨이지 않고 무거운 졸음이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