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영포럼 안승목 회장이 최근 고구려 문화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느낀 감흥을 본보에 전해왔다. 이에 본보는 역동적인 우리 역사의 현장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안 회장의 답사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우리 인천경영포럼 정회원 일행은 지난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5박6일간 중국 동북지방의 변경에 위치한 고구려 역사문화 유적지를 탐방하고 압록강에서 두만강·백두산에 이르는 만주변경 일대를 답사했다.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무덤과 궁터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수많은 유적들은 강대국 고구려의 위용을 능히 짐작케 했다.
첫째날 우리 일행은 선양(瀋陽)공항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환런(桓仁)시에서 가까운 본계수동에 도착했다. 400만년 전에 형성된 수중 석회동굴 내부를 배를 타고 들어가보니 조물주에 의한 것인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인지는 모르나 신비하고 기기묘묘한 비경에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중국인들도 이제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삶의 질이 어느 정도 향상된 때문인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앞선 관광 편의시설을 갖추고 관광 명소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곳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桓仁)시는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환런과 무슨 연관이 있을것 같은 지명이다. 만주 오랑캐(여진족)의 근거지로 누루하치가 부족간의 세력을 규합해서 나라를 세워 ‘후금’이라 하고, 아들대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으로 나라를 옮긴 다음 나라 이름을 ‘청’이라 호칭하고, 자신을 ‘태종’이라 부르게 했고, 이 지역 일대를 왕조 발원의 근거지로 신성시하여 한 때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지역을 삼은 곳으로 유명하다.
다음 날(2일차) 우리 일행은 청나라 서태후의 고향 인근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 중턱 즈음에서 버스정류장에 내려 오녀산 정상(해발 830m)에 올랐다. 고구려 ‘주몽’이 나라를 세워 40년간 수도로서 삼았다는 지역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오녀산성 정상에서 아래로 멀리 지형을 바라보니 과연 자연적 천하 요새다. 1400년전 고구려인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식사후 버스편으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시로 향했다. 압록강을 끼고 도로를 따라 가는 길 옆에는 국경 표시도 없는 북한 땅이 손에 잡힐듯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맑은 강물이 흐르고 그물 등으로 고기 잡고 발가벗고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 모습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건너 보이는 북한쪽 산야는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산 천지였다. 계단식 절벽에 밭을 일구어 농사 짓는 북녘 동포들의 삶을 목격하고서는 왠지 모를 소름이 돋고 가슴속에선 아쉬움이 북받쳐 올랐다.
우리 일행은 한적한 변경 압록강 지류의 시냇물 강가에 버스를 정차시켜 놓고 미리 준비해간 시원한 수박 등 과일을 나눠먹으며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뒤 5시간 걸려 북한 땅과 마주한 옛 고구려 두 번째 수도 지안시에 도착했다.
변방 산간 오지에 위치한 지안은 변경지방인데도 시골답지않게 현대식 편의시설과 함께 현대화된 도시계획으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날(3일차) 아침 일찍 지안박물관을 시작으로 회원들은 또다시 역사문화 탐방길에 나섰다. 박물관에는 그 옛날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각종 생활도구와 무기 등 많지않은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430년간의 고구려 수도임을 증명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압록강 건너로 한 눈에 보이는 북한지역 광산공장에서는 쉴새 없이 연기를 내뿜었지만 인적은 한가해 보였다. 북한 땅과 국경을 가장 가까이 접하고 있는 지안시는 전체 인구 30만명 중에 2만명 정도가 조선족으로 중국인들과 더불어 우리 말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지안시는 비교적 정리가 잘되어 있는 한적하고 깨끗한 도시로 국내성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강물이 압록강으로 흐르고 도시 변두리 여러 곳에 드문드문 고구려 무덤들이 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으로 중국측 학자들에 의해 보호 관리되고 있었다.
국내성엔 옛 성터와 궁궐터 흔적이 깊은 산 계곡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고구려의 궁궐이 있었던 환도성은 도시의 한 가운데 아파트 주위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어 그나마 장구한 세월 속에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好太王)의 봉분은 무너져 내리고 봉분 내부의 벽화도 물과 습기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 관리 자체가 너무나 부실해 보였다. 이토록 훌륭한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산이 타국에, 그것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관리상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에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만주 벌판의 넓은 영토를 확장하고 고구려의 전성기 시대의 부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당시의 기록을 후세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비(높이 6.39m 가로 2.3m, 무게 약 37t)를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자, 위대한 정복자의 면모를 마주한듯한 감격에 가슴이 벅찼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20대 장수왕은 이 비석의 4면에 예서체로 된 44행 1775자에 달하는 글자를 새겼으며, 14~15㎝ 정도 규격의 글자로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천연 자연석에 새겼다. 광개토대왕비는 오늘날 고구려가 중국 역사가 아닌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역사 자료 유물로 전해져오고 있다. 이곳에서 1㎞쯤 떨어진 곳에 장군총으로 불리우는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높이 11.28m에 정사각형 5m의 장수왕 능은 동양의 피라미드로 알려지고 있다.
장수왕은 지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약 240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할 때까지 최초의 왕으로 알고 있는데 평양에서 머나먼 이 곳 지안에 자신의 무덤을 축조하는 것이 그 당시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평소 장수왕은 생전에 사후 자신이 묻힐 무덤을 준비해 두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조선시대 좌의정을 지낸 김종서와 최윤덕 장군이 변방 오랑캐 여진족이 노략질과 도둑을 일삼던 곳에 6진과 4군을 설치하고 국경 수비를 했던 평안북도 변경 만포진과 지안시의 접경지역을 찾았다. 하루에 한 번 기차로 북한 만포 상인들과 중국 지안시 상인들이 오가는 철길을 거닐어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흰 페인트로 그어진 선의 건너편 북한측 철로가 눈에 들어왔다. 잘 정돈된 중국측 철로와 달리 다 썩어 문들어져 가는 철로를 목격하면서 북한 사람들의 실상을 다시한번 생각했다. 강건너 바로 앞에 펼쳐진 북한 땅을 남의 나라 중국에서 바라본 후 발길을 되돌릴 때에는 기약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통일의 그날이 언제일까 답답한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