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최고 통치권자가 되려는 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춰야 할까? 현대사회학의 태두인 독일의 막스 웨버는 예지, 결단력,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등을, 1930~50년대 미국의 대표적 정치학자였던 찰스 메리엄은 지식, 경륜, 도덕성, 국가발전에 관한 철학 등을 내세웠다.
또 영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키는 청렴결백, 국민설득능력, 위기관리능력 등을 꼽았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역대 성현과 선비들은 인(仁), 예(禮), 덕(德)과 함께 백성을 하늘 처럼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과 몸가짐을 강조해 왔다. 건국이래 숱한 명사들 중 관운(官運)이 뛰어난 인물로 고건총리가 꼽힌다. 그는 1년 반전부터 차기대선의 유력한 인물을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단연 1위로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흘러간 인물' `지나간 인물'인 고씨가 특히나 20~30대의 지지속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대체로 여·야당을 막론하고 거론되는 대선후보 지망생들이 국정운영의 능력·경험·경륜 등에 있어 지극히 부족하고 미덥지 않다는 설명들이다.
물론 흔들리는 정국,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야간의 흙탕물싸움-상쟁(相爭)에 따른 식상함 등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지지자들은 고씨의 깨끗한 몸가짐, 풍부한 행정경험, 화려한 요직경력 등에 상당한 호감을 가졌던게 분명하다.
대체로 사회와 국정이 어지러울수록 구관(舊官)이 명관(名官), 풍부한 경륜, 안정감, 중도적 성향 등은 장점으로 지목되고 있다. 반면 그에 대한 부정적 견해, 반대론 역시 만만치 않다. 자기의견, 소신, 결단력, 책임감이 없고 무사안일이 몸에 배어 있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때는 3일간, 그리고 1980년 5·18 비상계엄때는 청와대 핵심비서관으로 있으면서 1주일간 잠적한 점을 들고 있다.
또 행정의 달인(達人) 운운하나 무소신·무직언(直言)으로 `처세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하고 있다. 서울시장 재임때의 수서비리사건은 일찌감치 적극적인 대처로서 막을 수 있었던 것을 미루고 눈치를 보다가 불거졌다는 비판론도 있다.
이밖에 외환위기때 총리로서 지나치게 방임한 점, 그리고 현재에도 국정현안에 대한 뚜렷한 소견을 그때 그때 내지 않고 있고 정치적 색채, 이미지 등이 모호하다는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론에 대해 고 전총리측은 여러차례 사실과 다르고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나름대로의 증거와 자료를 들어 설명한 바 있다.
그동안 고 전총리는 여·야 각당 일각으로 부터의 영입론속에 스스로도 신중하게 탐색을 거듭해 왔으나 5·30지방선거를 계기로 지지율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느낌이다. 정가에서는 지나치게 장고(長考)를 계속하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고 전총리 스스로 “(지지자들을) 너무 기다리게 한 것 같다”며 그동안 몇차례 연기해 왔던 희망연대의 발기대회를 오는 28일 실행할 뜻을 밝혔는데 역시 관심사는 “희망연대가 정당결성을 위한 정치적 결사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모색하는 국민운동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그는 “기존 정당의 기준으로 이쪽 저쪽중 한쪽에 서라는 것은 무리”라고 했지만 무리가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 고 전총리는 우선 정치를 본격적으로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내년 대선에 나설 뜻이 있는지 없는지를 국민에게 명확히 밝혀야 한다. 출마할 뜻이 있다면 독자적 창당을 하든지 어떤 세력과 연대하겠다는 것을 천명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부터 국가의 안정·발전·국민화합의 비전을 구체성있게 마련해야 한다. 만의 하나 장고속에 안정성있고 편안한 영입만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다. 시대는 바뀌었으며 민의·민심은 매우 유동적이다.
이제 기다림보다 오랜 국정운영의 경력·경험·경륜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도전하고 국민에게 먼저 검증과 심판을 요구하는 자세가 긴요하다. 형세를 살피고 계산하는 기다림의 철학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도전하는 철학으로 바꾸어야 한다. 더이상 공짜 행운은 없다. 본인이 쟁취해야 한다.
/이 성 춘(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