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폭포를 배경으로 일행과 함께 기념촬영
고구려 문화 역사유적지 답사 3일째인 7월 17일 광개토대왕비를 비롯 평안북도 변경 만포진과 지안시의 접경지역 등을 둘러본 우리 일행은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관광버스로 중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에 위치한 퉁화역(通化驛)으로 향했다. 밤 10시에 도착예정인 야간열차(4인 침대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우리 일행은 다음 방문지인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7시간여 동안 달린 야간열차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새벽 5시경에 이도백하역에 도착했다.

4일차인 7월18일 이도백하역, 눈부신 아침 햇살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이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잘 포장된 시멘트 도로의 좌우로 시원하게 우거진 원시림 숲을 따라 장백폭포가 올려다 보이는 주차장에서 천지 바로밑까지 올라가는 지프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지프에는 5명씩 짝을 맞춰 타고 올라가게 되는데 천지를 향해 오르는 백두산 길에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먹구름과 빗방울, 안개 등 얼마안되는 시간동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자연의 조화는 순식간에 우리 인간의 마음 또한 변화무쌍함을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가슴 졸이던 순간 순간을 지나 중국사람들이 말하는 장백산의 ‘천지’ 바로 밑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간간이 비구름과 안개 등이 오고 가고 이어 백두산을 덮고 있는 각종 희귀한 구름떼들은 쉬지 않고 요동치고 있었다. 천지를 불과 150m 남겨놓고 걸어 오르는 기분이란 가히 한반도내에서 가장 높은 2천750m의 명산을 오른다는 바로 그 기분 자체였다. 천지의 아름다움을 이번에는 꼭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할 터인데….

아아!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장쾌한 ‘천지’의 모습!

가슴 벅찬 감회는 어떻게 필설로 표현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말 그대로 ‘애국가’가 절로 나온다.

1년 365일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 나는 이 곳에 다섯 번을 와서도 천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었다.

하늘과 땅이 닿는 곳에 하나의 바다가 있으니, 길이가 4.3㎞ 지름이 3.8㎞ 최고 깊이는 320m가 된다고 한다. 하늘에 뜬 구름이 물위에 비치니 이 또한 한 폭의 인간 세계의 신선들이 노니는 풍경이 아닌가 싶다.

우리 일행은 장백폭포(천지폭포)에 손발을 잠시 식히고 천지 온천으로 피로를 풀고 버스로 한 참 지나 북한에서 운영하는 휴게소에 들렀다. 한적하고 외진 산속에 외화벌이로 나와 있는 북한 아가씨들의 모습을 보고 북한의 한심하고 딱한 어려운 경제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건을 사고 싶어도 살 물건도 없고 차라리 동정심에 불쌍히 여겨 비싼 가격인줄 알면서 우황청심환, 안궁환을 팔아 주는 현실을 알아나 주는가 싶을 정도다.

조선족 옌볜자치주 옌지로 가는 길에서 넓고 넓은 만주 벌판의 대지위에 심어진 옥수수 밭과 농경지를 바라보았다. 일제 강점기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기위해 이곳 척박한 북간도 땅에 와서 온갖 죽을 고생을 다하며 땅을 일구었을 것을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저녁 늦게 5시간 걸려 도착한 옌지는 한국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현대화되어 있었지만 지금도 도시 전체에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옌지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독립투사들의 근거지로 삼았던 룽징시를 찾아 천재 시인 윤동주와 건국 독립운동가, 정치 지도자들이 졸업한 대성중학교를 방문했다. 대성중학교에선 당시의 기록 사진들을 보관 전시하며 조선족의 뿌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 일송정이 있었던 높은 산을 바라보고 용정 푸른 들과 선구자의 노래에 나오는 해란강을 바라보니 강폭은 좁고 강물은 현대화의 물결속에 오염되어 흐르고 있었다.

오는 길에 옌볜농과대학 시험연구소에서 운영하는 곰 사육장에 들러 웅담진액을 시식한 다음 두만강 최북단 변경에 위치한 투먼시로 출발, 한 시간만에 중국인과 북한인들이 드나드는 변경 투먼교에 이르렀다. 함경북도 횡령 땅을 남의 나라에서 바라다만 보고 있자니 마음이 영 그렇고 해서 뗏목 배를 이용해 북한 땅에 인접하니 숲속의 북한 젊은 아이들이 남루한 옷차림에 담배를 요구했다. 우리 일행은 중국과 비교해서 폐쇄된 북한의 어려운 현실을 눈으로 목격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옌지에 다시 도착해서 북한에서 운영하는 유경식당에서 1인당 2만원 정도 하는 평양냉면으로 식사를 했다. 도중에 접대원 아가씨들의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와 `휘파람', 한국가요 등 몇 곡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흥을 내보았지만 기계화된 그들의 율동과 서비스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다음날(6일차) 우리 일행은 선양시내에 위치한 후금을 세운 청나라 태조 누루하치릉(소릉)을 찾았다. 300년전 5천년 역사 이래 조선국 임금이 적국의 왕 앞에 나아가 신하의 예를 올리고 머리를 세 번 땅에 부딪치며 항복을 했던 곳이다.

36만평의 넓은 소릉을 거닐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와 7년간 생활하며 청나라를 위해 직접 명나라와 싸우기도 했다는 기록을 접할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유비무환의 국가의식을 갖고 미래를 향해 부국강병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다짐도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이로써 중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나는 이번 고구려 역사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국가간에는 영원한 우방도 적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의 우방이 상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이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오늘날 중국은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어 가기 위해 동북공정을 진행중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고구려가 만약 삼국통일을 했다면 오늘날 한국은 세계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