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말 의정부에서 작은 축제가 열린다. 더불어 사는 사회문화제 2006. 관계자들은 줄여서 `소수자 축제'라고 부른다. 이주노동자, 노숙인, 장애인, 새터민(탈북자), 결혼이주여성…. 왠지 왼쪽 가슴 아래께가 저려오는 호칭들이다. `우리' 속의 `그들'이 축제마당을 연다.
지난해 가을 `소수자 축제'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기계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것을….' 행사장 입구,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사진에 붙어있던 설명이 마음을 쿡 쑤셨었다.
소수자는 `투명인간'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사고를 쳐야, 사회문제가 되어야 반짝 관심을 받을 뿐이다. 그리곤 이내 잊혀진다. `소수자 축제'는 이 투명인간들을 드러내주는 붕대다.
그렇다고 소수자들이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를 발산하는 우울한 자리는 결코 아니었다. 시각장애인 성악가가, 트랜스 젠더 댄스그룹이, 탈북 시인이, 이주노동자 밴드가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정신장애아들이 6개월을 익힌 핸드벨 연주솜씨를 뽐내기도 했고, 보육원 출신 청소년들이 경쾌한 스포츠 댄스 스텝을 밟기도 했다. 객석에 앉은 `다수자'가 모두 일어나 박수치고 환호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딱 두 가지만 알면 돼. 자기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폭두목 황회장(천호진 분)이 내뱉는 대사다. 우리 모두 그렇게 조폭처럼 살아왔고, 살아가지 않는가. `소수자 축제'는 그 안티테제다. 조폭 세상의 해독제다.
어찌 보면 소수자 역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이주노동자가 대표적 예다. 결혼이주여성도 마찬가지다. 노숙인, 장애인, 새터민, 트랜스 젠더, 양심적 병역거부자 또한 필요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몸으로 알려주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묻지 않는다. 마음이 불편해서, 해답이 없다는 이유로, 아니, 더 솔직히 말해 알아봤자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물론, `머리'로 소수자 문제를 인식하는 경향은 몇해전부터 확산되고 있다. 소수자는 내쳐야 할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라는 자각도 생겨났다. 지구촌 단위로 사람이 섞이고, 인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는 시대에 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일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다수의 다수자가 소수자를 돌아보는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뿌리깊은 단일혈통 미신, 약삭빠른 경제적 타산, 완고한 가부장적 도덕률 따위가 다수의 `가슴'을 막고 있는 탓이다. 소수자를 돌아보자는 목소리는 그래서 여전히 소수다.
`소수자 축제'는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축제 주관자들은 소수자를 대변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다수자들에게 그냥 와서 함께 하나가 되어보라고 넌지시 권할 뿐이다. 가슴을 열고 축제를 즐기다 보면 다수자와 소수자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믿는다.
올해 더불어 사는 사회문화제 프로그램도 풍성하다. 함께 하는 음악회 `공감 공명 그리고 조화', 영상과 사진전시회 `동행', 소수자 예술활동 발표회 `함께 날아보자꾸나', 마당극 `바람을 타고 나는 새야', 심포지엄 `소수자의 문화복지', 결혼이주여성 먹거리 솜씨 자랑, 1일 도서관 `공유' 등이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 이틀(9월8~9일) 동안 펼쳐진다고 한다.
소수자 문제는 소수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다수자들의 문제다. 나는 소수자인가 다수자인가. 올해도 꼭 가서 가슴으로 인간을 만나볼 터이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