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전학을 많이 다녀야 했던 나는 낯선 학교에 적응해가는 몇개월의 시간이 고통스러웠다. 선생님·친구·학교풍습까지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고 특히 성적표를 통해서만 나를 증명해야 하는 새로운 환경이 싫었다. 대한민국 학교라는 것이, 학생의 지성과 감성을 파악하기에 얼마나 무능한지 그때 이미 다 알게 됐다. 수학점수와 영어점수로 설명할수 없는 나의 정체성이 무자르듯 난도질 당하는 광경은 사춘기 소녀가 감당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전학 첫날,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그날은 정들었던 친구들과 작별하고 눈물범벅이 돼 상경한 첫날이었다. 생경하고 주눅 든, 촌에서 올라온 학생을 앞에 두고 교장선생님은 잊을수 없는 멘트를 날려 주셨다. “이런 성적표로 서울에서 어떻게 학교를 다니려고 하냐.”

나는 그가 폄하한 하찮은 성적표로도 많은 선생님과 친구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부족한 수학점수를 메워서 원하는 대학에 갈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성적표에 없는 앙드레 지드와 헤르만 헤세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토록 좁고도 협소한 안목으로 어린학생의 자존심을 짓밟았고, 자기 학교의 학생이 된 아이로부터 존경심을 잃었다.

문제는 그 교장선생님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현장은 명문대를 향한 좁은 문에 학생줄을 세워, 교육관료로서의 업적을 쌓으려는 스승이 아주 많다. 그래서 웬만한 대학에 갈 학생을 제외한 아이들은 쭉정이 취급을 받는다. 판검사인 제자보다 파란색 옷을 입은 노동자가 된 제자를 귀하게 생각하는 스승은 별로 없다.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것의 부당함을 일깨워 주는 스승은 보기 힘들다. 이런 교육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노동자·농민·도시서민으로 살아가야할 대다수 아이들이 자신의 조건과 현실을 패배감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교육은 망한 교육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시민으로서 익혀야할 자유와 평등·권리를 교육받지 못한다. 명문대를 위해서 `눈감아' `말들어' `시키는 대로 따라해'라는 명령어에 `인간의 권리'와 같은 필수적인 항목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다 보니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치던 고등학생 한명은 46일동안 곡기를 끊고서야 예배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종교의 자유를 쟁취한 시민혁명이 인류의 영광으로 기록된지 200년이 지난 얼마전의 일이다. `내 머리의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두발자유화를 외친것도 작년의 일이다.

그리고 얼마전 수원시 모고등학교 학생들은 강화된 두발규정과 소지품검사·강제자율학습·강제보충수업등 엄격한 학칙에 반발해 종이비행기를 던지고 교실의 불을 껐다 켰다하는 시위를 벌였다는 혐의로 감시를 받고 있다. 교사들은 외부단체와 접촉한 사람을 찾는다며 학생들의 휴대폰을 빼앗았고, 인터넷기사에 학교규정을 밝힌 덧 글을 단 학생은 교무실로 끌려 갔다.

이들의 사정을 알고 찾아간 인권활동가에게 달려든 학부모 한명은 “우리 애는 맞아서 다리에 멍이 들어 왔지만 애들은 역시 맞아야 한다”는 상식없는 말을 뱉었다. 면담자리에 나온 교사들은 “학생들의 시위는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다”고도 말했다. 학부모도 교사도 교장도 모두,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다. 다만 `수백억을 벌어들이는 펀드매니저가 되어라, 수억짜리 외제차를 타고 폼나게 살아라'는 미션만을 재촉한다.

자기권리를 박탈당한 청소년이 자유와 평등·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의 시민으로 성장할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훈련이 필요한 고도의 가치와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권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제한되고 빼앗길 수 없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다. 박탈당한 기억, 무시당한 기억은 미래에도 잊혀지지 않고, 다른 약한 이들을 향해 답습된다. 많은 어른들은 시민권을 잃었던 청소년기의 억울함을 복원하고 학교에서 외치는 학생들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물신주의에 몰락하는 인간의 존엄을 지킬수 있는 길은 청소년이 시민임을 보장하는 것이다.

/박 진(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