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확률 5천분의 1’의 작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상륙작전과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 꼽히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불리한 조건에다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작전을 지원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돼 당시 맥아더 장군의 참모들은 인천상륙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선택은 적중, 크로마이트(Chromite)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천상륙작전 56주년을 맞아 세계 전사(戰史)에서 최고 상륙작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흔적들을 찾아보았다.

▲등대에 불을 밝혀라-팔미도 등대

1903년 6월1일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을 향해 첫불을 밝힌 우리나라 제1호 등대. 이같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팔미도 등대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을 때 유엔군 병력과 대함대가 무사히 인천에 상륙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이끌었다. 팔미도 등대 아래에 설치된 인천상륙작전 기념비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1950년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는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특공대가)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상태,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바닥에서 최규봉(KLO 고우트 대장)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 함대 261척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녹색해안에 상륙하라-상륙지점 표지석

1950년 9월15일 새벽 맥아더의 진격명령이 떨어진 후 유엔군 제7합동 기동부대는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미 해병대 제1사단, 미 보병 제7사단, 국군 해병대 제1연대, 국군 제17연대 등 약 7만5천여명의 병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이날 새벽 월미도와 주변 적진지에 포탄을 퍼붓는 동안 제1단계로 미 제5해병연대 3대대는 20여척의 상륙주정에 분승, 오전 6시30분께 녹색해안(Green beach)인 월미도에 상륙해 월미도를 확보했다. 제2단계 상륙은 오후 만조시 이루어졌는데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적색해안(Red beach)인 만석동 지역에 오후 5시33분 사다리로 방파제를 올라 상륙했다. 거의 동시에 미 제1해병연대는 청색해안(Blue beach)인 송도해수욕장 서부지역으로 사다리를 이용해 해벽을 올라 상륙, 해안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인천 중구 월미도 선착장(녹색해안)과 동구 만석동 대한제분 입구(적색해안), 남구 용현5동 해안도로 입구(청색해안)에는 상륙지점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한눈에-인천상륙작전 기념관

1984년 9월15일 개관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525)은 인천상륙작전은 물론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에서부터 휴전까지의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쟁 역사관이다. 주요 시설은 전시실과 영상실, 야외전시장, 야외공연장, 자유수호의 탑, 인공폭포, 전망대, 휴게실 등.

전시관에선 한국전쟁 당시 피아간 무기를 비롯, 남·북한군인의 복장, 인천상륙작전 디오라마, 인천상륙작전 영상 및 자료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는 또 영상관, 놀이마당, 소공원, 산책로, 물레방아 등 다양한 문화쉼터가 마련돼 영화 상영 및 공연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펼쳐지고 있다.문의:(032)832-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