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경기도청 앞 장애인 시위가 4주째 접어든다. 지난 7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노숙투쟁, 천막농성으로 이어졌다. 집회를 막는 과정에서 휠체어 장애인들이 다치는 불상사도 있었다. 도청 정문에는 이들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콘크리트 방지턱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들의 요구는 의외로 단순하다.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제도화하라!'

제도의 얼개 또한 간단하다. 가령 사회활동을 하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1급 뇌성마비 장애인이 있다고 하자. 그/그녀가 직업을 갖고 일을 하려면 출근준비에서부터 근무지로 이동까지 거들어줄 사람이 절실하다. 그 인력이 활동보조인이다. 장애인도 어엿한 사회구성원이고 보면 장애인들은 당연히 사회를 향해 이러한 서비스를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

여기서 `비장애인 실업자도 넘쳐나는 판에…'라고 말꼬리를 달면 얘기는 끝이다. 장애인에게조차 경쟁사회의 정글법칙을 들이대는데 뭐 할 말이 남겠는가.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 정도 후진성은 이미 벗어났다고 보는 게 정상이다. 보건복지부가 내년 7월부터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시범적으로라도 시행하겠다고 밝힌 게 그 증거다.

이 단순하고 당연한 요구가 왜 장기농성으로 이어져야 하는 걸까. 쉽게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가시돋친 설전으로 상대방 감정을 자극하면서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의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어느 장애인운동가가 언젠가 이런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장애인 복지확대의 역사는 곧 투쟁의 역사다.' 그의 말마따나 오늘날 장애인이 확보한 복지권리 치고 국가와 사회가 먼저 보장해 준 예를 찾기 힘들다. 장애인 차량 LPG 지원과 세금감면, 보장구 지원, 전기료 감면, 장애인 수당 등 어느 것 하나 장애인들이 소리소리 지르며 힘겹게 싸워 얻어낸 결과 아닌 게 없다. 바로 이같은 수동적 자세가 몸을 지탱하기도 버거운 장애인들을 자꾸 `투쟁일선'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애인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보조인'에 대한 논의는 벌써 몇년전부터 이뤄져왔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선진국처럼 장애인 자립·자활을 돕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와 지역사회는 이에 무관심했다. 장애인의 권리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확보해 주어야 하는지 고민을 해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결국 당사자들이 또한번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쟁점이 된 지역은 경기도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경남 충북 인천 광주 등지에서 크고작은 갈등 끝에 장애인단체와 지자체 간에 제도화 작업이 진행중이다. 경기도에도 이미 지난 4월 이에 대한 내용이 전달됐다. 느닷없는 요구는 아닌 셈이다.

논의가 겉도는 가장 핵심적 이유는 돈이다. 사실 활동보조 서비스를 전면실시할 경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서비스지원이 절실한 중증장애인 수가 경기도만 해도 6만명에 이르며, 그 예산만 3천500억~4천억원으로 추산된다.

경기도가 일단 몸을 움츠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요구는 당장 전면실시하라는 게 아니다. 더욱이 경기도보다 재정자립도가 낮은 자치단체들도 서비스 도입에 동의했다는 점에서 도의 소극적 자세는 설득력이 없다. 예산타령을 앞세우기보다는 전향적으로 함께 검토하는 쪽이 도민들에게 약속한 `잘사는 경기도'로 가는 모습 아닐까.

아마 내일도 장애인들은 도청 앞에서 머리띠를 묶을 것이다. 당연한 권리도 극한투쟁까지 가야 최소한이나마 확보할 수 있는 사회. 우리는 언제쯤 그 수준에서 한단계 도약할 수 있을까. 마음도 머리도 무겁기만 하다.

/양 훈 도(장애인복지의 역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