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화국 시절인 1985년, 재계 7위를 뽐내던 국제그룹이 돌연 공중분해됐다. 신발공장에서 출발한 이 그룹은 70년대 산업지원 덕에 종합상사로 탈바꿈, 급성장한 재벌이다. 하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공식 발표였다.
그런데도 항간에선 경제외적 요소가 작용했다 하여 두고 두고 논란이 됐다. 즉 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화가 심하지 않았음에도, 5공정권에 밉보인 탓이란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꾸어 말해 정치자금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위야 어떻든 정치권과 재계의 관계를 이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낸 예도 드물성 싶다. 사실 그때만 해도 웬만한 정치인과 재벌 치고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운 경우는 드물 것이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었다. 이른바 정경유착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었으니까.
10여년이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를 몇달 앞둔 시점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자못 놀라운 결의를 했다. “법에 의하지 않은 불투명한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극히 당연한 내용인데도 항간에선 의견들이 분분했다. 우선 정치권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론이 나왔다. 한편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정치권이 호응 안하면 괜한 헛공론이 되리란 회의론도 제기됐다. 그런가 하면, 불법 정치자금은 상당부분 정치권의 요구와 기업들의 필요가 어울린 결과이므로 양측 모두 자성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았다. 그야 어떻든 그때만 해도 경제인들의 그같은 결의는 더 이상 불법적인 돈을 뜯기지 않겠다는 신선한 의지 표명으로 보였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아예 합법적인 정치자금마저 내지 않겠다고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기껏 정치 잘해 국민 잘살게 해달라고 준 돈을, 개인용도나 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사례가 적지않아서다. 중앙선관위 실사 결과 드러난 정치자금 불법사용 내역을 보면, 불쾌감을 넘어 차라리 맥이 빠진다. 세금과 헌금으로 이뤄진 자금을 마치 쌈짓돈인양 구두닦기와 사적인 선물비용, 심지어 노래방 등 유흥비로 소비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거법위반 벌금이나 교통법규위반 범칙금을 내는데도 사용됐다. 이러니 누가 흔쾌히 후원금을 내겠다고 할지 의문이다. 이런 정당과 정치인들에게 국정을 맡겨야 하는 게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알다가도 모를 게 또 정치판 속인가 보다. 불법 정치자금 안주겠다고 결의까지 했던 경제인들이 뒤에선 계속 꼼수를 쓰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정치자금법상 개인이 아닌 기업체 등은 후원금을 낼 수 없다. 개인의 경우도 한 정치인에게 낼 수 있는 최고액을 500만원으로 한정하고 있다. 또 120만원을 넘길 때는 이름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갖가지 편법을 동원, 이같은 제한을 교묘히 피해나간다. 일부 기업들은 임직원을 동원, 각기 다른 이름으로 고액을 분산시켜 제공해온 것이다.
이처럼 뒤에서 딴짓하는 이유가 무얼까. 물론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다. 대부분 어떤 특혜를 바라거나, 이미 이뤄진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 어쩌면 그 옛날 국제그룹처럼 되지않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탈많은 정치자금. 그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체 등과 정치권의 검은 고리를 끊겠다며, 몇차례 법을 고쳐왔지만 좀체 나아지는 기미가 없어 보인다. 하기야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의 의식수준은 그대로인데, 법만 수십번 뜯어고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싶기는 하다. 그럴바엔 차라리 정치자금 자체를 없애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면 또 정치활동 못한다고 아우성일테고, 이래 저래 애물단지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무언가 대책은 있어야겠다. 뻔한 말이지만, 아직도 법에 틈새가 있다면 이를 메우고, 보다 엄격한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의 의식개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하튼 제발 국민이 좀 믿게 해줬으면 좋겠다.
/박 건 영(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