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가 인생의 진로를 바꿔 놓는다.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이름난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아무리 학력(學力)이 좋아도 학력(學歷)차별에 내 몰린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 대학실패는 곧 인생실패다. 출신대학은 사람을 전인적으로 평가하는 자격증이나 다름없다. 학벌사회가 연출한 입시지옥이 갈수록 더 가혹해지는 형국이다.
입시전쟁을 체험하고 자란 학부모들은 학벌사회의 모순을 너무나 잘 안다. 자녀가 사회에서 박대받지 않으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며 모든 희생을 감수한다. 국-영-수를 잘 하라고 봉급을 몽땅 털어 초등학교 때부터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내몬다. 이제는 이것만으로는 죽는다며 모두 영어에 인생을 건다. 세계화가 몰고 온 영어열풍에 편승해서 말이다.
걸음마만 시작하면 유아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친다. 제 나라 말도 채 배우기 전에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초등학교 때부터 방학이면 영어권으로 영어연수를 보낸다. 아예 조기유학을 보내는 숫자가 부쩍 늘어난다. 아직 부모가 돌봐야 할 처지니 엄마는 따라 가고 아빠는 돈을 벌어 송금한다. 이른바 기러기 아빠다. 미국, 영국은 돈이 많이 드니 필리핀,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프리카까지 보낸다.
영어열풍에 이어 몰아친 논술광풍이 학부모의 주머니를 털고 학생을 혹사한다. 2008학년도 대학입시부터 논술비중을 높인다고 하자 그 바람이 맹위를 떨친다. 학습지 회사들이 유아원, 유치원을 상대로 논술교재를 만들어 팔 정도다. 동네 보습학원에서는 유아를 상대로 논술반을 운영한단다. 갓 젖을 뗀 아이들에게 글을 읽어 주고 그림이나 글로 내용을 요약하는 따위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말 현재 전국에 입시보습학원은 모두 2만8천176개다. 그 중 32.5%인 9천154개는 주요 대학들이 논술고사 도입을 확대한 2004년 이후에 생겼다. 논술열기를 짐작하고도 남을만하다. 이 기간 중에 논술전문학원만도 402개나 생겨 465곳으로 늘어났다. 실제 논술시험을 치는 대학은 소수인데 논술광풍이 학부모를 불안하게 만들어 더욱 극성을 부린다.
논술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학원가는 발빠르게 시장변화에 대응한다. 신문들이 논술지면을 만들어 독자를 끌려고 안간힘을 쓴다. 외국자본이 시장장악에 나섰다. 이미 교재출판사와 학원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많은 학원강사들이 논술전문강사로 변신하고 수능학원도 논술전문학원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교육은 강 건너 불처럼 방관만 하니 학원가는 더욱 번창한다.
논술광풍의 주범은 대학이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할 기준이 없으니 논술을 강화한다는 뜻은 이해된다. 수능시험은 변별력이 부족하고 내신성적은 점수조작과 학교서열로 신뢰성이 낮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논술시험이 선발기준으로서 얼마나 공정한지도 따져볼 일이다. 같은 채점자가 시간을 달리하여 재 채점하면 점수가 달라질 만큼 주관적 판단이 작용한다. 교육현장의 준비도 감안해야 하지 않나?
교육부는 무엇 하는 곳인지 모르겠다. 대학이 그런 추세로 나가면 일선 학교들이 준비하도록 제도적-재정적 지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나? 암기식 교육을 논술식 교육으로 전환하려면 교사의 재 교육이 시급한데 그런 노력을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교과내용을 분석, 해석, 해설, 비판하는 능력을 배양하려면 교사의 재 교육은 필수적이나 손을 놓고 있다.
붕괴된 공교육을 방치하니 자녀를 사교육에 맡긴다. 지금도 사교육비 부담이 너무 과중한데 영어에다 논술비용까지 져야 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낀다. 빈민화를 촉진하는 엉터리 교육정책이다. 세계적으로 낮은 출산율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 영 호(시사평론가·언론광장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