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역사에서 가장 특이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일 듯하다. 착수에서 완료, 자진신고와 폐기에 이르기까지 남아공 핵개발은 미스터리 투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남아공 핵이 북한 핵 때문에 새삼 `역조명'(?)을 받는 정도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1993년 3월 당시 남아공 대통령 드 클레르크는 자신들이 핵개발을 끝냈다고 발표했다. 독일과 스위스 과학자들 도움으로 핵폭탄 7기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세계가 경악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핵무기를 제조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타국 감시에는 그토록 서슬퍼렇던 IAEA도 NPT도 속수무책이었던 셈이다.
후일담이지만 남아공이 비밀 핵개발에 매달렸던 20여년간 미국 CIA도 몰랐다고 한다. 1970년 남아공이 민간용 핵발전을 위한 새로운 우라늄 농축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을 때도, 1976년 남아공 원자력위원회가 `우리도 핵폭탄을 만들자'고 말했을 때도, 1979년 남아프리카 인근 해역에서 낮은 수준의 핵실험을 탐지했을 때도, 1980년 처음으로 핵무기가 만들어졌을 때도 미국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음모론' 시각에서 보자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기는 하다. 모든 나라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는 미국이 이를 몰랐을리 없고, 다만 국제적 파장을 고려해 더듬수를 쓴다는 식의 설명 말이다. 그 진상은 9·11테러 전모와 더불어 먼 훗날 밝혀질 일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남아공 사례는 북한과 비교할 때 너무나 대조적이다. 북한은 90년대부터 일부러 미국 첩보위성에 `핵의혹 시설'을 노출시켰다. 사찰대가로 거액을 받고 텅빈 동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걸핏하면 `핵 으름장'을 놓았고, 이번 핵실험 전에는 예고편까지 날렸다. 남아공과 북한 중에 누가 더 현명한 걸까?
남아공이 왜 핵개발을 했느냐를 놓고도 추측이 분분하다. 앙골라 내전 등 복잡 불안한 주변 정세 때문이라는 분석은 일견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래식 무기 위주인 내전에 핵으로 대응하려 했다는 것부터가 상식과 어긋난다.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국제왕따설'이다.
남아공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흑백인종분리정책은 악명이 높다. 국제사회가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남아공 지배세력은 아파르트헤이트를 버리지 않았다. 급기야 남아공은 모든 국제 행사에서 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올림픽에도, 월드컵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시대착오적인 국제왕따는 세계가 자신들을 무시하지 못할 수단을 찾다가 결국 핵무기 개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국제왕따가 비밀 제조에 성공했던 핵폭탄을 자진신고한 시점 역시 국제사회 복귀시점과 맞아떨어진다. 90년대 들어 국내외 압력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드 클레르크 정권은 93년 넬슨 만델라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왕따의 유일한 원인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하는 마당에 세계가 싫어하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이유 또한 사라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백인 지배층이 핵무기까지 흑인정권에게 넘겨주기는 싫어서 자진신고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91년 구 소련 붕괴로 앙골라 등 인접 적대국의 위협이 희석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저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하겠지만, 역시 핵개발 동기, 즉 국제왕따 탈피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후 남아공은 의료용, 산업용 핵이용 이외의 핵시설을 국제기구의 감시 속에 완전 철거했다. 요즘도 드물게 남아공 핵무기가 아직 남아있다는 음모론적 기사가 나오기는 하지만 남아공은 이제 2010 월드컵 개최지가 될 정도로 어엿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됐다. 핵무기를 없애는 지름길은 근본동기를 해결하는 것임을 남아공 사례는 증명해 준다.
/양 훈 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