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말 현재 인천출신 법조인(판사·검사·변호사)은 113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현직판사가 16명, 검사 36명, 나머지는 변호사다. 이중 서울(10명)과 수원(1명)에서 자리를 잡은 변호사 10여명을 제외하면 고향에서 뿌리를 내린 변호사는 50여명. 인천지방변호사회 소속 전체 변호사는 260여 명에 이른다.
출신 학교별로는 제물포고등학교가 33명으로 가장 많은 법조인을 배출했다. 그 다음이 서인천고(26명), 부평고(25명), 인천고(24명), 대건고(16명), 광성고(15명), 동인천고(12명), 송도고(12명), 인하대 부속고(10명), 동산고(9명), 선인고(9명) 등의 순이다.
지난 1949년 고시1회 시험이 치러졌으니, 긴 세월과 인구수에 비해 지역출신 법조인은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듯 싶다. 대구지역의 특정고등학교 한곳에서 그동안 배출한 법조인보다 인천출신 전체 법조인이 적으니 말이다.
이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한다. 인천은 일제에 의한 강제개항이후 서구문물유입의 통로였다. 자고나면 새로운 물건이 쏟아져 들어왔고 상점들이 속속 생겨났다. 이후 인천상권은 급속히 성장했고, 외국 상사도 잇따라 대리점을 개설했다. 모두가 장사해서 돈을 벌던 시기였다. 1920년말을 전후해 지금의 배다리~경동사거리~신포동 등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이 형성됐다.
이때 인천사람은 잘 먹고 잘 살려면 `장사가 최고'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판·검사 등 권위주의적인 직업보다는 상업 등 실용주의적인 직업을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인천법원과 검찰도 지원과 지청 수준에 머물러 권위도 없었던 만큼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당시 학교교육도 그랬다. 제물포고 초대교장인 길영희 선생은 법대를 진학하는 학생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공계·사범대·농대 가야만 살길이라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제물포고에선 한해 법대를 3~4명밖에 지원하지 못했다고 이 학교출신 법조인은 회고했다. 다른 학교의 사정도 비슷했다고 한다. 지역적인 특성과 교육분위기가 한몫 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인천출신 법조인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기문 (인천고출신)변호사가 경선을 통해 인천지방변호사회 회장으로 입성했고, 인천출신 법조인의 모임인 `인법회'도 올초 검사장으로 승진한 박한철 법무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을 회장으로 추대한 뒤 그를 중심으로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인천에서도 변화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부장판사출신인 박희문(제물포고)·조용균(부평고) 변호사와 검사출신 이종엽(광성고)변호사 등이 “시민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잇따라 법무법인을 꾸렸다.
인천출신 법조인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남부지원 김영혜(신명여고) 부장판사는 세계여성법관회의 이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인천이 국제도시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인천출신 법조인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 본다.
/송 병 원(인천본사 사회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