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는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정답고 상서로운 존재로 상상 속의 새다.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고 활기 넘치는 생명력과 영혼을 전해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처럼 답답함이 온 몸을 옥죌수록 그 파랑새의 노랫소리는 더 그리워진다 하겠다.

우리는 이미 파랑새를 찾은 적이 있다. 이 땅의 민초들이 탐관오리의 속박에 분연히 일어섰던 동학혁명 속에서 우리는 파랑새를 찾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혁명의 실패를 슬퍼하던 민초들이 절망 속에서 불렀던 민요 노랫말 속에 파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랑새의 청명한 울음소리는 기존의 질서체제가 변화되기를 바랐던 민초들에게는 희망이 녹아있던 노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면서 파랑새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처럼 기존의 질서를 바꾸자는 것은 아닐 게다. 단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지고 있어 그 꿈을 되찾기 위한 방편이란 생각이다.

우리의 뛰어난 장점은 그동안 다른 민족에서 찾아 볼 수 없던 역동성과 미래에 대한 도전정신, 창조적 꿈의 실현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초라하게 쪼그라든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제 각각이 이해타산에 따라 제 몫 챙기기에 바빠 중심 잃은 팽이처럼 비틀비틀이다. 정치권의 우왕좌왕도 이제 도를 넘어섰으며 경제·사회적 분열상은 우려를 넘어 심히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형국이다. 주말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시위는 이어져 도심지는 온통 시위대로 인산인해이다. 급기야는 쇠파이프를 들고 횃불로 방화를 서슴지 않는 폭력시위까지 등장했다. 아파트 값 폭등은 서민들의 분노감을 폭발시켰고 계층간의 양극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촉매제 구실을 톡톡히 했다. 서민은 서민대로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들이며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불만이 가득하다. 공직자나 일부 정치인들의 도덕적 해이현상과 부패의 심각성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사실이다. 정부 인사도 신뢰가 없다.

국란이라고 했던 외환위기 때보다도 사회의 이완속도는 더 심한 것이 현실이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나 기가 막힐 뿐이지만 그 원인은 몇 가지로 진단된다. 우선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확연하다는 점이다. 개혁과 혁신을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던 대통령, 참여정부의 환상은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다. 정책실패에 이은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불신팽배는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곪아 있는 상태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가 10%도 안 될 정도라고 하니 위정자들과 국민간의 거리는 이미 상당히 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국민들로부터의 불신과 냉소만이 남은 셈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년도의 정국이나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도 염려스럽다. 하반기로 갈수록 대선의 영향력은 커져 지역과 이념대결 등 과거의 악습이 재연되면서 국론분열과 사회 혼란상이 예견된다. 지금도 그 전조가 보여 우려가 한둘이 아닌 상태이다. 성장률 퇴조 등 불투명한 경제전망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을 증폭시켜 기업은 투자를 꺼리고 실업률은 높아져 서민들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질 것이다. 이런데도 활기 넘치는 역동성과 도전정신이 살아나겠는가. 움츠러들고 침체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난제들을 한꺼번에 푸는 뚜렷한 해법이 없다는데 우리들의 고민이 있다. 국가를 이끌 리더십이 실종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파랑새의 노랫소리인 새로운 희망과 꿈을 찾고자하는 심정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여겨진다. 지금 세계는 무한 경쟁의 시대로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자리가 없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 집결해도 경쟁이 힘든 세상이다. 그런데도 내분과 계층간, 이해집단간 시기와 질투로 제몫 찾기에 급급하다면 파멸은 자명하다.

이젠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잘못을 되짚어보고 그동안의 반목과 질시를 말끔히 덮어야 한다. 결자해지 하자는 얘기이다. 그러면 파랑새는 다시 꿈과 행복, 희망을 갖고 우리들에게 날아 올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신발 끈을 졸라 매보자.

/송 인 호(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