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마산행배의 학살<완>

“1950년 가을에 부역자로 몰려 교동지서에 수감됐다. 곧 인천 부두 앞 매우 큰 해군함 위로 옮겨졌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묶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배위에서 재판이란 게 진행됐는데, 매우 간단했다. 한명씩 이름을 부르고, 바로 선고를 했다. 죄목도 변론도 없고, 이름과 선고만 있었다. 약 200명 중 무기징역과 15년형을 받은 사람은 나를 비롯해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사형이었다. 마산에 도착한 뒤 배 아랫부분에 있었던 우리들 15명만 내렸다. 중간에 어디 들른 곳도, 머문 곳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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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인천 중구 월미산에서 내려다본 월미도 앞바다. 왼쪽에 보이는 섬이 작약도다. 수도권을 대표하는 관광지 월미도 앞바다는 6.25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강화 교동면이 고향인 한모씨의 증언이다. 한씨는 인천 앞바다 군함에서 소위 `선상재판'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수장되는 걸 직접 보진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하선하면서 해군들에게 `이송 중 사형이 집행됐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 군함의 종착지는 마산이었다. 이외에도 강화군에 사는 이모씨 등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천~마산간 배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마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그 뒤 전혀 소식이 없었다는 점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마산이었을까.

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는 “수도권 일대에서 잡아들인 부역자 등을 마산과 대구형무소에 보내기 위해서 해로를 택했을 것”이라며 “학살지는 인천 앞바다였겠지만 희생자 중 인천사람은 일부고, 서울과 경기, 심지어 강원도에서 잡혀온 사람들까지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마산행 배에서 벌어진 학살은 인천 뿐 아니라 전국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천지역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한 진실규명신청 중 이 수감자 이송 중 학살에 관한 것은 한건도 없다. 육지와 달리 고립된 바다 위 선상에서 이뤄진 학살은 해군 외 목격자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유족이 있다고 해도 `실종' 이외에 달리 추측할 방도가 없었을 터. 결국 이송 중 학살의 진실을 풀 수 있는 열쇠는 5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해자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