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마산행배의 학살<완>
“1950년 가을에 부역자로 몰려 교동지서에 수감됐다. 곧 인천 부두 앞 매우 큰 해군함 위로 옮겨졌다. 그곳엔 많은 사람들이 묶인 채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살벌한 상황이었다. 배위에서 재판이란 게 진행됐는데, 매우 간단했다. 한명씩 이름을 부르고, 바로 선고를 했다. 죄목도 변론도 없고, 이름과 선고만 있었다. 약 200명 중 무기징역과 15년형을 받은 사람은 나를 비롯해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사형이었다. 마산에 도착한 뒤 배 아랫부분에 있었던 우리들 15명만 내렸다. 중간에 어디 들른 곳도, 머문 곳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마산이었을까.
인천지역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는 “수도권 일대에서 잡아들인 부역자 등을 마산과 대구형무소에 보내기 위해서 해로를 택했을 것”이라며 “학살지는 인천 앞바다였겠지만 희생자 중 인천사람은 일부고, 서울과 경기, 심지어 강원도에서 잡혀온 사람들까지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마산행 배에서 벌어진 학살은 인천 뿐 아니라 전국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천지역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한 진실규명신청 중 이 수감자 이송 중 학살에 관한 것은 한건도 없다. 육지와 달리 고립된 바다 위 선상에서 이뤄진 학살은 해군 외 목격자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유족이 있다고 해도 `실종' 이외에 달리 추측할 방도가 없었을 터. 결국 이송 중 학살의 진실을 풀 수 있는 열쇠는 5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가해자들의 손에 꼭 쥐어져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