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중화권 영화는 국내에서는 여전히 찬밥 신세. 일부 블록버스터와 유명 감독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제 수상작은 물론 오락영화까지도 홀대받고 있다. 최근에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인기도 한풀 꺾였다.
◇유명 영화제 석권하는 중화권 영화
올해 베를린 영화제 최고영예인 금곰상은 중국영화 '투야의 결혼'에 돌아갔다. 감독은 세계 무대에서는 무명인 왕쿠아난(王全安).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역시 '스틸 라이프'를 출품한 중국의 자장커(賈樟柯) 감독이 차지했다.
자장커 감독은 이미 '소무' '임소요' '세계' 등을 통해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시나리오를 쓴 '동' 또한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받는 영예도 함께 누렸다.
베를린 영화제 8대 주요 상 중 하나인 음악상의 지난해 수상작은 홍콩영화 '이사벨라'였고, 같은 해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상' 또한 중국영화 '럭셔리 카'가 받았다.
이처럼 중화권 영화는 최근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ㆍ베를린ㆍ베니스 등을 포함, 세계 유명 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의 기쁨을 누리며 주목받고 있다.
중화권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환영받는 것은 중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빠르게 진행되는 산업화와 홍콩ㆍ마카오의 중국 반환 등 급변하는 정세는 영화의 매력적인 소재로 세계인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투야의 결혼' '스틸 라이프' '이사벨라' 등은 모두 격변하는 중국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올해 베를린 경쟁부문에 진출한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히야쯔가르' 또한 중국의 내몽골을 배경으로 급변하는 사회상황 속에서 변화하는 윤리의식을 담고 있다.
◇중화권 영화 국내 흥행은 '빨간불'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개봉된 중화권 영화는 총 12편(중국영화 6편, 대만영화 1편, 홍콩영화 5편). 같은 기간 일본영화는 51편, 한국영화 117편, 미국영화 134편이 개봉됐다.
점유율을 살펴보면 중국ㆍ대만ㆍ홍콩을 합친 중화권 영화의 점유율은 1.27%. 한국영화(63.6%), 미국영화(31.0%)와는 비교도 안 되고 일본영화 점유율(2.4%)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이다.
흥행 성적도 썩 좋지 않았다. 베를린 영화제 음악상 수상작 '이사벨라'는 1천200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고, 자장커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직후 개봉돼 영화제 후광을 기대했던 '세계'도 관객 1천900명을 잡은 것이 전부다. 영화 '첨밀밀'로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천커신(陳可辛) 감독의 신작 '퍼햅스 러브'의 관객(9만5천500명) 또한 10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관객 10만 명을 넘긴 영화는 '무인 곽원갑'(36만 명), 'BB프로젝트'(40만6천500명), '야연'(43만6천900명) 등 3편뿐. 홍콩스타 리롄제(李連杰)와 청룽(成龍), 중국의 장쯔이(章子怡) 등 한국에서 특히 각광받아온 중화권 스타를 내세운 작품치고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1월 말 개봉된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신작 '황후화'도 관객 92만 명을 끌어모은 뒤 막을 내렸다.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장이머우 감독의 판타지 액션사극 '영웅'(190만 명)이나 '연인'(141만6천 명)의 흥행 성적에는 크게 못 미쳤다.
톱스타 비에 비견되는 홍콩스타 저우제룬(周杰倫)이 주연을 맡은 액션영화 '이니셜D'도 지난해 관객 1만 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중국영화 흥행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신호다.
한 영화사 관계자는 "장이머우 감독의 액션대작도 비슷한 영상과 스토리 때문에 이제는 식상하다는 소리가 많이 나온다"면서 "중화권 영화를 수입하겠다고 나서는 영화사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중화권 영화의 쇠퇴는 홍콩영화계의 쇠퇴와도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전성기를 누렸던 홍콩영화계는 비슷한 소재의 아류작을 잇따라 재생산하면서 철퇴를 맞았고, 스타 감독과 배우들도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점으로 대부분 할리우드로 떠났다.
홍콩 출신 우위썬(吳宇森) 감독과 영화배우 저우룬파(周潤發)는 이미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았고 '아비정전' '중경삼림'의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미국 자본으로 만든 '상하이에서 온 여인'을 곧 칸 영화제에서 선보인다는 후문이다.
CNS엔터테인먼트 조영석 대표는 "여전히 홍콩을 대표하는 스타는 청룽, 류더화(劉德華) 등 1980~1990년대 스타들"이라면서 "홍콩영화는 더 이상 대형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장쯔이 빼고는 중국 스타도 거의 없어 영화를 홍보할 수단마저 없다"고 말했다.
◇좋은 중화권 영화도 설 자리 잃어
자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는 지난달 수입이 확정됐다. 상을 탄 지 5개월 만의 일. 예전 같으면 여러 수입사들이 앞다퉈 수입하려 했겠지만 국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던 것.
'스틸 라이프'를 수입한 위드시네마 허은도 대표는 "흥행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서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해 이 영화를 처음 봤는데 그 동안 아무도 이 영화를 수입하지 않았다는 점에 우선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자장커 감독의 전작보다는 상업성이 크다고 판단돼 수입을 결정했다"면서 "5월께 국내 2~3개 극장에서 소규모로 개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투야의 결혼'의 판권을 확보하고 있는 시네클릭아시아도 아직 국내 개봉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현재는 해외 세일즈를 진행 중이다.
서영주 이사는 "해외배급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영화"라면서 "무협물로 대표되는 중국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돼, 몽골을 배경으로 한 아트영화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배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예술영화는 그렇다고 쳐도 상업영화 또한 개봉 규모가 크지 않다.
쇼박스가 수입ㆍ배급하는 '컴페션 오브 페인(Compassion of Pain)'은 100개 이하의 극장에서 4월15일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홍콩영화 부활의 신호탄이라 평가받는 '무간도' 시리즈의 류웨이장(劉偉强)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화양연화' '무간도'의 량차오웨이(梁朝偉)와 '중경삼림' '연인'으로 유명한 진청우(金城武. 일본명 다케시 가네시로)가 가세한 작품이다. '무간도'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디파티드'가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ㆍ감독상 등을 휩쓴 것을 생각하면 예상보다는 작은 규모로 개봉하는 셈.
쇼박스 측은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의 힘을 믿고 수입했다"면서 "정확한 타깃 층만을 고려해 개봉 규모를 잡았다"고 말했다.
스폰지 조성규 대표는 "영화의 주요 관객층인 10~20대가 스타일리시한 영화에 매료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에 이런 풍의 영화를 만드는 허우샤오셴(侯孝賢)ㆍ왕자웨이 감독 등의 작품을 제외하고 국제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해도 중화권 영화가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중국영화는 촌스럽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은 한 국내에서 사랑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화사 진진의 김난숙 대표는 "최근 중화권 영화들 중 새로운 스토리와 작품성으로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많다"면서 "좋은 영화들마저 홀대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