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국민들은 4년마다 왕(王)을 선출한다. 그리고 선출된 왕에게 일정한 한계의 강력한 권력을 부여한다. 하지만 왕은 이같은 한계를 뛰어넘어 재임중 사실상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한다."

150여년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슈어드가 남북전쟁 기간중 링컨의 권력행사를 지켜본 후에 한 말이다.

흑인 노예제가 발단이 된 남북전쟁 기간동안 링컨은 연방의 존속이냐 붕괴냐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일일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통령의 결단으로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지난달 말 89세로 사망한 아서 슐레진저 전 하버드 대학교수는 저명한 역사학자로 케네디 대통령시절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케네디와 동갑이자 하버드대 동창인 그는 케네디가 당선된 후 '쓸만한 인재는 모두 발탁해 감으로써 하버드 캠퍼스에는 다람쥐만 남았다'고 언론이 보도할 무렵, 백악관에 합류했다. '잭슨 대통령의 시대', '케네디행정부 1000일', '미국 역사의 순환' 등 여러 역저를 낸 슐레진저가 국내외에서 유명한 것은 '제왕적(帝王的)대통령'이란 말을 처음으로 썼기 때문이다.

미국의 건국 초기부터 대통령이 왕과 같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어 왔지만 그는 '제왕적 대통령제(The Imperial Presidency)'란 저서에서 이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이 용어를 그는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력행사가 입법·사법부 보다 월등히 강해 3권분립 원칙을 흔들거나 위기에 몰아넣는 상황이라고 썼다.

미국의 대통령은 4년에 한번 국민의 신임을 받았을 경우 4년동안 국민과 의회로 부터 어떤 방해나 압력을 받지 않고 평화유지·전쟁수행·예산지출·권력행사를 의도대로 결정·행사한다고 슐레진저는 지적했다.

미국은 3권분립이 철저하게 확립된 나라로 손꼽힌다. 대통령은 선출된 후 의회와 대법원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며 또 이들로 부터 어떤 책임도 추궁당하지 않는다. 의회는 장관을 부를 수도 없고 또 대정부 질문이란 것도 없다. 다만 의회는 예산안·법안 등의 심의와 관련한 청문회에 장관을 증인으로 부르며 장관은 기꺼이 참석해 질의에 응답한다.

1973년 출간한 '제왕적 대통령제'는 전적으로 닉슨 대통령을 겨냥해 쓴 책이다. 슐레진저는 닉슨이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밖으로는 월남전 확대에, 안으로는 정치적 반대세력에 멋대로 행사해 제왕이 되는 듯 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몰락하고 말았다고 꼬집었다. 따라서 민주적인 대통령, 성공한 대통령은 취임후 겸손한 자세로 민의를 존중하고 파악해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헌법은 제헌때 이승만 국회의장의 고집으로 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갑자기 바뀌면서 국회는 장관의 불신임권과 출석요구권 등 내각제 요소가 가미되었다.

어찌됐건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제왕적 대통령의 성향을 보여왔다. 특히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 5년 단임제 이후의 대통령들도 거의 제왕과 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식의 권능을 행사해왔다. 당사자들은 부인하겠으나 갖가지 권력행사·통치행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은 대통령의 권위와 권능을 크게 탈피·약화시켰기 때문에 제왕과는 무관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국민의 의사와는 어긋난 소위 역주행(逆走行) 역발상(逆發想)식의 행위 역시 '제왕적'인 성격과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외침을 막기위한 전쟁 등 국가비상시를 제외하고는 민주국가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국민과 의회가 진지한 감시와 견제로 왕의 출현을 막아야 한다.당연히 대통령 자신도 양식 준법 절제 민의존중 겸손의 자세로 왕에의 유혹을 차단할 의무가 있다. 왕대신 '시민대통령', '민주대통령'이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닉슨의 실패를 거울 삼아야 한다.

/이 성 춘(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