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임 (난파 홍영후 선생의 딸)
(이 글은 2007년 4월 10일 개최되는 '난파탄생 109주년 기념음악회'에 홍난파 선생의 딸 홍정임 여사가 보내온 편지이다)

오는 4월 10일은 저의 아버님이신 난파 홍영후선생의 109주년 탄생 기념일입니다.

그의 고향이신 화성시에서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게 된 것을 더욱 뜻 있고 축복된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저는 9년 전 난파탄생 100주년 때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KBS 음악당 앞에 세워진 아버님 동상에 100세를 축하드리는 마음으로 화환을 걸어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9년이 지난 오늘, 아버님의 그 동상은 어느 지하실 구석에 있습니다. 동상을 뜯어가지 않으면 부숴버린다는 협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홍난파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신 불우한 음악가이셨습니다.

그가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유학시절 일본에서는 기미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아끼시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시고, 3·1 운동에 필요한 선언서를 인쇄해 내셨습니다. 그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시고 급히 귀국하셔야 했던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 당시의 현실은 그가 왜 갑자기 일본을 떠나야 했었는지 이유조차 떳떳이 밝힐 수 없는 형편이었으니 그 기록조차 희미할 뿐입니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본 학교에 복학을 원했을때 '그의 사상이 불순하다' 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고 합니다. 역사에는 그가 학교를 옮겼다고만 전해질 뿐입니다.

1931년 미국 유학시절에는 흥사단에 가입하셔서 흥사단 단원으로 활약하셨으며 흥사단의 노래도 작곡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흥사단가의 작곡자가 알려지지 않고 있던 관계로 그는 흥사단가의 작곡자가 아니냐는 혐의까지 받으셨습니다.

1937년 일제는 사상 탄압을 강화했고, 홍난파는 수양동우회 관련자로 종로경찰서에 검거 되셨습니다.

쇠약한 몸으로 고문을 당하시고 옥고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님은 늑막염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시면서 72일 만에 석방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하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으셨고, 그 압력에 못이겨 군가 형식의 2곡을 작곡 하셨고,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한 두 차례 쓰셨습니다. 그 후 병세는 악화되셨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가 되셨습니다.

그 당시 음악계의 선두에서 리더십을 보이던 홍난파로서 그의 친일 행적은 극히 소극적이었고, 자의가 아닌 강압에서였다는 점이 가장 주목되는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조선총독부 비밀문서에서 발굴된 그의 '사상전향서'에서도 그것이 자의가 아닌 강압에서였음을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감옥에서 석방 후, 사망 직전에, 다 늦게 일본에 순응을 해야 하셨을까요?

그것이 진정 친일이었을까요? 저는 그때 아버님의 심경을 헤아려보게 됩니다.

저의 아버님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힘들게 나라를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그의 육신은 재가 되었어도 그의 영혼은 길이 살아 있고, 그가 남기신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 지워질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이 될 것입니다.

이 음악회를 위해 힘써주신 최영근 화성시장님, 화성음협 김현숙 지부장님, 정희준 고문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