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협상의 성공을 알리는 축포 소리가 요란하다. 협상을 잘해 쌀이 빠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예외 없는 개방을 주장하며 쌀 개방을 강압했으나 이것은 협상을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말려들어 쌀을 빼는 대가로 다른 분야에서 일방적 양보를 거듭했다. 농업만 해도 10~20년에 걸쳐 관세를 없앰으로써 홍수처럼 밀려올 미국산 농축산물에 무방비 상태에 놓였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면서 쌀은 소비수요의 4%가 들어오는 길이 열렸다. 10년이 지나 2004년 쌀 수출국과 재협상에 들어가 10년간 소비수요의 8%인 317만을 수입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서도 미국은 생떼를 써서 매년 5만씩 할당받는 특혜를 챙겼다. 만약 한-미 FTA에서도 미국의 억지가 먹혔다면 다른 수출국들이 추가개방을 요구하거나 다자간 협정위반으로 제소하는 문제가 생긴다.
미국은 한국에서 쌀은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쌀시장 완전개방을 지렛대로 삼아 다른 분야, 다른 품목에서 양보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실제 미국은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중단립종)를 공급할 여력도 충분하지 않다. 농축산물 중에서 미국이 가장 눈독을 들이고 노린 품목은 쇠고기다. 그래서 협상대상도 아닌 위생검역을 물고 늘어져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 길을 튼 것이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여 2003년 12월 수입금지 됐다. 그해 쇠고기 소비량은 39만이었는데 20만이 미국산이었다. 관세가 40%인데도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것이다. 앞으로 관세가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폐된다. 소값이 벌써부터 폭락세를 보이면서 축산기반 붕괴를 예고한다.
제주도에서 감귤은 뭍의 쌀과 비견된다. 전체농가의 86%가 감귤을 재배하며 농업 조수입의 56.9%를 차지한다. WTO 출범에 따라 관세율이 50%로 낮아졌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미국산 오렌지에 밀려 감귤나무가 뿌리째 뽑히고 있다. 지난 2005년만 해도 미국산이 11만6천993이 들어와 전체 수입량의 95%를 차지했다. 여기에다 생과 40만에 해당하는 가공용 농축액이 3만9천이나 수입됐다.
개방한파에 떨던 나머지 감귤나무도 고사위기를 맞을 처지다. 9~2월 출하기에는 관세를 그냥 유지한다. 그러나 봄, 여름에는 계절관세라고 해서 30%로 내린다. 그나마도 7년이 지나면 아예 없어진다. 감귤은 제주도 총 생산액의 12.8%를 차지한다. 감귤나무 없는 제주경제의 앞날이 암울하다.
쌀은 농가소득의 46.9%를 차지한다. 그 쌀도 다자간 협정에 의해 2014년이면 다 열린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가족농이라 쌀만 농사 지어서는 먹고 살지 못한다. 그런데 1천531개 품목 중에 37.6%인 576개 품목은 관세가 즉시 철폐된다. 돼지고지 닭고기는 10년간, 사과 배는 20년간에 걸쳐 없어진다.
분유 감자 콩 천연꿀 등은 관세를 유지하나 일정량은 관세 없이 들어온다. 모든 농축산물이 개방벼락을 맞는다고 보면 틀림없다.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은 19세기 중엽 중농정책을 포기했다. 공산품을 수출하고 식량은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게 이익이라는 근시안적인 판단을 믿었던 것이다. 그 영국이 2차대전 중에 히틀러의 대륙봉쇄령에 의해 혹독한 식량난을 겪어야만 했다. 식량안보를 강대국에 맡긴 나라는 주권을 지키지 못한다.
/김 영 호(시사평론가·언론광장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