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정에서 필수 가전품으로 자리를 잡은 김치냉장고는 좀처럼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러시아 탱크 기술에서 착안,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일반냉장고는 문을 열면 무거운 한랭공기가 바닥으로 쏟아져 흘러내리면서 외부의 뜨거운 공기가 유입된다. 이 때문에 문을 닫으면 다시 냉각시켜 본래의 온도까지 도달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러나 김치냉장고는 김치의 맛과 영양이 오랜기간 유지될 수 있도록 보관온도를 섭씨 2~5도 정도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치는 온도가 올라가거나 공기와 접촉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산이 지속적으로 생성, 시어지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는 러시아 탱크 냉방에 사용되던 '열전소자'를 냉장고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과거 러시아 탱크에는 에어컨이 없어 병사들이 더위 때문에 애를 먹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이후 전기를 넣으면 앞면은 차가워지고 뒷면은 뜨거워지는 열전소자를 만드는데 성공, 탱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이 같은 기술은 국내에 들어와 한국 기업에 의해 김치냉장고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열전소자 사용은 일반냉장고처럼 더 이상 압축기가 필요없게 돼 김치냉장고와 화장품냉장고 등 소형냉장고 제작을 가능하게 했다.

열전소자는 전기를 통하면 흡열로 냉각을 하는 특징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매우 세밀하게 온도를 설정하고 조정할 수도 있다. 정수기에서 온·냉수와 함께 얼음이 동시에 나오는 것 역시 러시아 탱크에서 사용됐던 열전소자를 응용한 기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러시아의 원천기술과 한국의 상용화기술이 만나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에게 유용한 '히트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기·전자기술과 환경·바이오, 광학·나노기술 등 수준 높은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한 러시아의 원천기술이 국내로 들어오고 있다. 특히 러시아와의 기술교류사업은 삼성·LG 등 대기업 중심에서 중소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삼성의 경우 국내에만 2천여명의 러시아 과학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는 러시아 내 자사 연구소에서 휴대폰 3D게임을 개발, 최근 국내 시장에 내놓았다. 이처럼 대기업들은 러시아와 유라시아에 R&D센터를 직접 운영하거나 자금을 지원하면서 협력체계 구축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중소기업들도 러시아 기술교류 사업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재)인천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이하 인천중기지원센터)는 지난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광학대학교(ITMO)를 비롯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공과대학교(NSTU)와 타쉬켄트 국립공과대학교(TSTU) 등 유라시아 3개 대학 총장을 인천으로 초청, 인천지역 중소기업들과의 기술교류를 협의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일 열린 러시아 우수기술 포스터 전시회에는 270여개 인천지역 중소기업 대표와 기술개발 담당자들이 다녀가면서 러시아 기술에 대한 중소기업의 높은 관심을 반영했다. 또 오는 6월에는 이들 유라시아대학을 방문, 기술교류상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선착순으로 접수된 이 상담회 참가 신청에는 단 하루만에 20여개 업체가 몰리면서 일찌감치 마감됐다.

지난 2005년 10월 시작된 인천중기센터의 러시아 기술교류 사업에는 30여개의 인천지역 중소기업이 러시아와 유라시아 현지를 직접 방문해 모두 58건의 기술교류 상담을 했다. 이 중 인천남동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아이에이치에스(대표·정달도)는 스타낀국립공과대학과 자동로봇기술 등 4건의 기술교류 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주)파버나인(대표·이제훈)은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러시아 광학기술을 3D모니터로 상품화하는 사업에 대한 MOU를 체결했다.

인천중기센터의 러시아 기술교류사업은 한국산업기술대학교 부설로 설립한 한러산업기술협력센터에서 주관한다.

이 센터를 통해서만 지난 2004년 6월 이후 서울을 비롯 경기·인천에 소재한 400여개중소기업이 러시아 기술 이전 관련 서비스를 받았다.

중소제조업체들이 러시아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술혁신의 절박함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선택과 집중'의 중소기업 육성 패러다임도 중소기업의 기술 개발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 국내 과학기술수준이 선진국과 맹렬한 기세로 추격하고 있는 개발도상국 사이에 낀 상태여서 중소기업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이전을 엄격히 통제하는 서방선진국과는 달리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기술이전에 대해 개방적이고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또 기술 이전 비용이나 조건에서도 상당히 유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어 기술집약형 혁신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상대라 할 수 있다.

러시아는 구 소련 당시 세계 과학자의 25%와 세계 기술자의 50%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전했을 만큼 과학기술 선진국이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보다 상용화 기술이 떨어진다는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에 비해 상용화 기술이 발달한 국내 기업이나 연구기관과 상호 보완관계를 맺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러 모두에게 이득을 주고 있다.

(주)신성시스템 이병옥 대표는 "중소기업들은 신기술을 도입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상실해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미국·독일·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러시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선진기술이 있으면 어디서든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06년 인천중기센터와 러시아 현지를 방문했던 인하대학교 이승걸 정보통신공학부 교수는 "서방선진국들의 상품성 우선 기술이 아닌 러시아와 유라시아지역 국가들의 과학·산업기술은 기초과학과 항공·우주 등 군용기술을 중심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하지만 러시아 등은 순수학문 등이 높은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제품화·상품화로 바로 연결하기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수 있는 만큼 중소기업들이 기술애로 사항을 풀 수 있는 해결포인트로 접목시키는 신중함이 요구된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