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동문 체육대회 모습
인천시 동구 창영동 30 언덕에 자리잡은 인천창영초등학교. 정문을 지나 3·1독립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에 이르니 기념비에서 3·1만세운동의 함성이 들리는듯 하다.

도머(dormer)창이 설치된 지붕과 홍예석으로 만든 초기 근세풍의 현관이 어우러진 적벽돌의 본관에선 한세기를 관통한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인천창영초등학교(교장·진영서)가 오는 5월 6일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5월6일 관립 인천일어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학생수 3명의 '인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다. 그후 학생수가 계속 증가하면서 인천일어학교로부터 이전, 12월9일 우각현 언덕 현 소재지에 목조 1동을 신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립 초기 학생들의 연령은 5세부터 25세까지 다양했는데 제1회 졸업식은 1910년 3월26일 열려 18명의 졸업생이 처음으로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이어 창영초등학교의 교명은 '제1공립보통학교'(1933년), '창영보통공립학교'(1936년), '창영공립심상소학교'(1938년), '창영공립국민학교'(1941년), '인천창영국민학교'(1945년)를 거쳐 1996년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다.

창영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다른 학교 개교 100주년의 의미와는 사뭇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보통학교령'에 의해 민족 자본으로 설립됐으며 학교 장소의 이전없이 같은 곳에서 제1회 졸업생 배출 이후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는 점 등이다.

총동창회 관계자는 "역사가 깊은 학교들 중에는 종교단체나 외국인 선교사 등이 문맹퇴치를 위해 교육활동을 펼치다가 정식 학교로 발전한 경우가 많이 있으나 창영초교는 1907년 4월1일 학교령 제4호 공립보통학교의 설치가 공시되면서 출범한 학교"라며 모교의 역사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3·1만세운동의 발상지로 특히 유명하다.

▲ 창영초등학교 제1회 졸업식 모습(1910년 3월26일).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3~4학년생이었던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은 3월 6일 학교 전화선을 끊고 동맹 휴교를 선언했다.

이들은 이날 정오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돼 징역형과 태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에 격분한 인천 시민들은 동맹 휴교와 상가 철시를 시작으로 3월 7일부터 8월까지 지속적인 군중 시위를 이어갔다. 당시 인천이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거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혹독한 폭정과 감시가 지속되던 곳이었던 점을 감안할때 이들의 '거사'는 역사적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들 가운데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김명진의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받은 연금을 모교 장학금으로 전달, '김명진장학회'를 설립했으며 올해 열두 번째로 '김명진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을 가졌다.

창영초등학교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24년. 학생수가 늘면서 교실이 부족해지자 인천 지방비와 인천 한국인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을 짓기 시작해 그해 3월31일 총건평 696평의 적벽돌 2층 건물을 완공했다. 창영초등학교 본관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돼 있다.

창영초등학교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게 '야구'. 1930년대 인천에서는 야구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1931년 매일신보사 주최 보통학교 야구 대회에서 창영초등학교가 우수한 성적을 내면서 재학생들이 야구후원회를 조직하고 선수들을 후원하기 위해 1인당 계란 한 개씩을 후원금으로 냈다고 한다. 그후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야구의 기틀이 되어 현재 많은 야구인을 배출하고 있는 산실이 되고 있다.

▲ 3.1독립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
창영초등학교는 또 시설이나 학교 운영 프로그램면에서도 선진적인 학교였다. 1936년 한 부유한 학부형이 사재를 털어 학교에 방송시설을 기증해 학교 방송실을 만들어 비가 오는 날에는 방송조회를 했는데 서울의 학교 선생들이 창영초등학교를 방문하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1953년에는 교내에 창영인쇄소가 세워져 학교 신문(창영어린이신문)을 비롯, 출석부, 통지표, 시험문제지 등 학교에 필요한 모든 유인물을 찍어냈다.

1955년에는 학교 뒤편에 2층 단독 건물의 도서관이 설립됐고 1958년에는 노천극장이 준공돼 학예발표회와 흑백 영화를 볼 수 있는 스크린으로 사용됐다. 교육 환경이 열악하기 그지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영초등학교의 자랑은 '창영이 배출한 인물'이다.

인천 언론계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는 고일(6회·1903~1975), 인천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우현 고유섭(9회·1905~1944), 우리나라 민사소송의 틀을 세운 전 대법원장 조진만(10회·1903~1979), 전 서울대 총장 신태환(18회·1912~1993), 제11대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은하(28회·1923~2003),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살리고 장렬히 산화한 소령 강재구(40회·1937~1965) 등은 이미 고인이 됐지만 창영인들의 가슴속에 뿌리깊게 남아있다.

이밖에도 이창홍(26회·전 경기도의회 의원), 박원근(27회·전 체신부장관), 김찬삼(29회·여행가), 임명진(31회·외교관), 김치홍(31회·전 성균관대 공과대학장), 박영성(31회·화가), 이지영(31회·전 공군사관학교장), 한태희(31회·전 중앙대공과대학장), 최영섭(33회·'그리운금강산' 작곡자), 이관(33회·전 과학기술처장관), 심정구(34회·전 국회의원), 지용택(41회·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이현부(44회·전 육군7군단장), 신용석(44회·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 이원복(60회·현 국회의원)등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의 각계각층에서 창영을 빛낸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진영서 교장은 "100년이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잘 살리고 창영이 배출한 훌륭한 선배들의 정신이 학생들에게 이어지도록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축, 새로운 미래의 100년을 준비하는 학교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