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희문 (인하대교수·영화평론가)
복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옳은데도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길 때 복수를 생각한다. 복수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법률적 처벌과는 달리 개인이 사사롭게 행하는 징벌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개인의 억울한 사정을 제대로 헤아려 주지 못한다고 믿는 순간 사사로운 복수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해진다. 스스로 정의의 집행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어느 재벌 총수의 복수극이 세간의 화제다. 아들이 어느 유흥업소의 종업원에게 폭행을 당하자 유력한 대기업 그룹의 총수인 아버지가 직접 부하 직원들과 함께 잡아들여다가 닦달을 했다는 내용이다. 사건의 실체와 경과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데다, 당시의 현장을 목격한 바도 아니어서 일의 선후가 어찌되는 가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여론이 진위 여부를 따져가며 돌아다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재벌총수의 이런저런 행동은 이목을 끌기 마련인 처지에, 살을 보태는 진짜 이야기 거리가 터졌으니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만있을까. 그 중에서도 언론은 바쁘다. 경찰조사 과정은 물론 재벌 회장이라는 사람의 일상 행동까지 시시콜콜 뒤집어 놓는다. 경찰 역시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다. 증거를 찾는다며 가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을 언론에 공개했고,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지경이다.

문제는 그 같은 보도 태도들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기보다, 여론 재판처럼 흘러가도록 조장한다는 점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재벌 총수의 아들은 어떤 이유로 업소 종업원들에게 피해를 당했는지, 아무리 시비가 붙었다 하더라도 종업원들이 합세해서 손님들에게 마구 행동해도 되는지의 경과를 밝히는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거두절미하고 비치는 모습은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이 사사로운 힘을 동원해 세상을 휘저었다는 식의 비난으로 모아진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종업원에게 맞을 정도로 시비가 번졌는지, 다툼이 있었더라도 당사자 선에서 수습할 수 없었는지, 아무리 화가 난다 하더라도 아들을 대신해서 나이든 아버지가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야 했는가라는 대목 등이 한심스러워 보이기는 한다. 아들의 억울한 처지를 아버지가 대신 다스려 주겠다는 소박(!)한 생각과 행동이 기름통을 들고 스스로 불을 붙이는 격의 사태로까지 번지고 있으니 다시 주워 담아 없던 일로 하기에도 늦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사건의 주인공이 된 아들과 아버지는 벌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떤 결과로 마무리 되든지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일이 개인적 행위를 넘어 재벌 일반의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얼마 전 미국의 버지니아 공과대학 구내에서 총 난사로 32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의 범인이 미국 영주권을 가진 한국인으로 밝혀졌을 때 우리 언론과 미국 언론의 보도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범인의 행동을 '한국인'의 행위로 연결 지으려 했는데 비해 미국 언론은, 미국 사회가 보살피지 못한 특별한 개인의 행동으로 한정시켰다. 범인의 국적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총기를 생산, 판매, 소지하는 것을 금지해야한다는 식의 논란도 예상외로 적었다.

재벌 회장의 '폭행' 혐의 사건은 미국 총기 난사 사건에 비하면 그 내용이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식을 전하는 언론의 태도나 논조는 훨씬 더 뜨거워 보인다. 희대의 복수극을 중계하는 듯한 태도다. 전하는 내용도 사실 확인의 단계를 넘어 재벌의 특권적 행태를 재단하는 수준으로 번진다. 사회 지도층의 윤리적 태도로까지 연결 짓는 것도 여전하다. 사건의 내용보다 바람이 더 센 경우다. 우리가 보려는 것은 사건의 실체인가, 기업가나 부자를 욕하고 비난하려는 빌미를 찾는 것인가?

/조 희 문(인하대 교수 바른사회문화포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