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캠퍼스가 가장 예쁘고 활기찬 계절도 봄이다. 신입생들이 들어오니 새기운이 넘치고, 다양한 꽃들과 신록이 펼쳐내는 파스텔 톤의 캠퍼스는 향긋하기만 하고 때로는 신묘한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봄이 펼쳐내는 자연의 향연에 걸맞게 전 세계 대학들의 공통정신인 자유와 진리 역시 한껏 기지개를 켜기 마련이다.
이처럼 예쁘고 좋은 계절에 자유의 상징이자 진리탐구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에서 잔인한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개인에게 내재된 악마성의 발현 때문에 고귀한 생명들이 죽음의 질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덧없이 스러졌다. 아마 역사는 2007년 4월을 또 다시 잔인한 달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잔인함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해맑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벌레를 서슴없이 밟아죽이고 잠자리 날개를 비트는 것만 보아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잔인함을 묘사한 예술 작품 역시 적지 않다. 단테의 신곡과 이를 표현한 로댕의 지옥의 문은 대표적인 예이다. 전함이 좌초된 후 물과 식량을 위해 동료들을 살해하고 그 인육을 먹으며 생존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메뒤즈 호의 뗏목을 보면 인간의 잔인성은 그 끝이 없다는 생각조차 든다.
인간은 절망과 좌절을 할 때 잔인하고 난폭해진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새겨져 있다는 '이 문을 들어가는 자 희망을 버리라'는 말처럼 이미 지옥에 온 자들은 희망을 버린 자들이다. 조승희 사건은 바로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인간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택할 수 있는 행동의 극단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인간은 그 잔인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랑과 용서를 할 수 있다.
이번 버지니아 공대 참사를 통해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잃은 것 이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상징의 하나가 봄날의 캠퍼스에 마련된 33인의 추모석 앞에 잇따라 놓여 있는 편지들이다. 특히 "너를 향한 사람들의 가슴 속 분노가 용서로 변하기를…네가 그렇게도 절실히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슬프다…"는 내용으로 조승희의 끔찍했던 삶을 용서하고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는 편지들은 성숙한 용서의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전 세계를 뒤흔든 성난 지진은 용서와 사랑의 문화 때문에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잠들기 시작하고 있다. 이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번 참사를 통해 사랑과 용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배워야 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5년 전의 미군 장갑차 사건처럼 사랑과 용서가 없었기에 온 나라를 증오와 혼란으로 몰고 가는 일들은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아울러 참사 초기에 우리가 보인 닫힌 민족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열린 민족주의로 가는 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물론 참사를 봉합하는 미국의 방식이 좋아 보인다고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이는 나라마다 죽음을 대하는 문화가 다르고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굳이 희생자들을 위해 금식하자면 32일 대신에 33일간 금식하자고 했어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민족의 일이라며 사죄하는 것 대신에 같은 인류로서 애도하고 그에 걸맞은 행동을 했어야 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
/임 동 욱(충주대 행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