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자 (시인)
'천년학'을 보러 어렵사리 극장을 찾았다. 대형스크린으로 봐야 할 영화 같았다. 그게 임권택이라는 노감독과 100번째 영화에 대한 예의려니 싶었다. 그만큼 영화계 후배들의 헌사가 아름다웠고, 기대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극장을 울리는 판소리가 너무 썰렁했다. 너무 장삿속으로만 영화를 건다는 불평도 슬며시 삼켰다. 젊은 층의 외면이 판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좋은 원작에 시대에 충실한 재현이나 적벽가 등의 판소리는 좋았다. 그런데 신문의 호평과 달리 설명적인 대사가 너무 많아 지루한데다 감각이 늙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었다. '서편제'나 '춘향뎐'은 판소리에 대한 접근만 아니라 표현도 신선했는데, 그런 전작을 넘어서지 못한 느낌이다. 어렵더라도 차라리 상징적인 고도의 예술영화로 만들지 싶기도 했다.

극장을 나오자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이 더했다. 난분분하던 매화 향기와 춘향가를 벗 삼아 작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대낮인데, 꾹 누르고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되작였다. 지금의 우리에게 전통은 과연 무엇인가. 시시각각 새 것을 만들고 뒤섞어대는 이 시대의 전통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그나마 판소리는 세계화의 가능성이 큰 장르인데, 위상이 저리 초라하니 어쩌나. 마당에서 질펀하게 어울려 놀던 판소리가 극장으로 들어가 박제된 명맥을 잇고 있건만 비상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하면 일본의 전통 대접은 놀랍기만 하다. 남다른 그들의 전통 사랑과 자긍은 '가부키 전용극장'과 '하이쿠 우편함'까지 만들어냈다(가부키와 하이쿠는 일본 미학을 집약하는 전통예술의 한 정점). 그러니 교토라는 고도(古都)를 지키는 온갖 규제가 되레 관광 수입으로 이어지고, 전통예술로 내방객을 세뇌하거나 일본 미학을 세계 곳곳에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일본의 전통정형시 하이쿠를 미국의 어린이가 영어로 짓는다니!). 이는 대물림 정신과 노년층의 증가 외에 국가 차원의 지원이나 방향타 역할에서 나오는 저력으로 보인다. 그런 것들이 쌓여 한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품격도 만드는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은 전통과의 단절로 큰 도약이나 전환을 이뤄왔다. 전통의 부정 혹은 전복이 예술의 한 태반이고 원동력인 것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도 없는 법이다. 전통을 우려먹든 메다꽂든 그 위에서 새로운 것들이 나오니 말이다. 게다가 끊임없는 퓨전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이 시점에서 보면, 전통은 정체성을 길러낼 수 있는 든든한 바탕이다. 자국의 전통에 대한 자긍과 애정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자긍이 없으면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이 없으면 즐길 줄도 모른다. 전통이 예의나 시시콜콜 따지는 시골의 먼 친척 할아버지처럼 고리타분해서 그저 피하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경험들은 교육과정에 국악 같은 전통의 비중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문제는 그게 전통에 대한 자긍이나 생활 속의 향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미없다는 게 무엇보다 큰 이유겠지만, 전통에 대한 이해나 소양 부족도 무관심을 낳은 주요인이다. 그렇다면 전통의 지속적인 현재화와 함께 소양을 길러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물론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재미의 창출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시쳇말로 '오지게' 재미있지 않으면 어떤 노력도 공허한 북장단에 그칠 것이다.

하여 '천년학'의 노을 속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다시 곰곰 본다. 전통의 창의적 변용이야말로 우리 예술로 세계를 모으는 큰 동력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발칙 발랄한 현재화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법고창신'을 우리 문화콘텐츠 전반의 화두로 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 수 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