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버지들의 잦은 스크린 외출이 올해만의 현상은 아니다. 지난 2004년 개봉된 '효자동 이발사'를 비롯해 '파송송계란탁'(2005년), '괴물'(2006년) 등 최근 몇 해 동안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들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마치 아버지의 귀환이라 해도 좋을 만큼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있었거나 아니면 여러 이유로 아비 구실을 하기 어려웠거나 부끄러운 처지에 있던 이들이란 거다. 영화 속 아버지들은 그간 못했던 아비 노릇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반복하고, 아버지로서 가족에게 이해 혹은 용서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관객들의 감동을 유도한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 3'와의 경쟁에서 맥을 못 추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아버지들의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전통적 유교사회였던 한국사회는 공적인 영역에서는 '君師父一體'라 하여 국가체제와 사회적 훈육체계를 실제의 아버지와 동일시 해 왔고, 사적인 영역인 가족구조 안에서는 '嚴父慈親'이라 하여 성별 분업을 내면화했다. 엄격한 아버지상은 아버지로부터 아들, 다시 손자에게 이어지는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가정과 교육을 어머니에게 맡긴 채, 이 땅의 아버지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숨 막히는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우리는 그 결실로 OECD 가입을 통해 드디어 선진국 대열에 가세하는 줄로만 알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아버지, 대한민국은 결정적인 추락을 경험한다. 국가로서의 아버지가 추락하면서, 계급과 사회구조의 재생산(훈육)을 담당하던 교육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당면한 과제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국가로서의 아버지는 전 지구화의 물결 속에 더 이상 든든한 민족국가의 울타리 노릇을 하기에 버겁고, IMF의 살벌한 경쟁과 도태를 경험한 중산층은 그간 쌓아올린 모든 것들이 모래성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뜩이나 살벌한 교육 열기에, 마지막까지 남는 최후의 경쟁력은 오로지 교육이라 생각한 학부모들은 붕괴한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을 원망하면서 해외원정교육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다음 세대는 해외에서 위탁교육 중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그것이 국가이든, 교육이든, 실제의 아버지이든 그들의 가족(공동체)과 진지하게 소통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나마 가족의 마음도 그들을 떠난 지 이미 오래다.
모든 꿈이 현실 속에 부재하는 것들에 대한 소망이라면 꿈의 산업인 영화는 이것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예술이다. 1930년대 미국인들은 '무지개 너머'를 꿈꾸었던 어린 도로시가 온갖 고초 끝에 '세상 어디에도 집 만한 곳은 없다'며 돌아오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가 주는 위안을 통해 대공황을 견뎌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 극장가에 범람하는 아버지 영화들은 아버지의 진정한 귀환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구조조정의 공포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다만 아버지로 상징되는, 든든한 울타리와 안정, 후원의 이미지를 판매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도, 교육도, 아버지도 현실 속의 '나'에게 더 이상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없는 현실이 실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강제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꿈의 안팎에서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전 성 원(계간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