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어렸을 적 부모님을 따라 공중목욕탕에 다녀온 뒤 동네 슈퍼에서 얻어먹는 바나나우유만큼 달콤한 기억이 또 있을까. 당시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란 노래가 있었던 것처럼 바나나는 당도가 높고, 맛있는 과일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바나나 1개(100g 기준)에는 93Kcal의 열량과 단백질 1.1g, 지방 0.1g, 당류는 22.5g으로 매우 높은 편이다. 그러나 비만의 요인이 되는 과당은 사과, 포도의 30%에 불과해 다이어트용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이밖에도 무기질과 칼륨의 보고이며, 소화에 무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노약자들의 보양식, 아기들의 이유식으로도 즐겨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맛좋은 과일의 대명사인 바나나가 향후 10년 이내 전멸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어째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BBC방송 인터넷판에서는 프랑스에 위치하고 있는 '바나나 개량을 위한 국제네트워크(INIBAP)'의 벨기에 출신 과학자 에밀 프리슨 박사의 말을 인용해 질병과 해충이 점점 우리가 먹고 있는 바나나를 위협하고 있다며 경고하고 나섰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바나나는 열매는 맺지만 씨 없는 작물이 된지 오래다. 바나나는 밀과 쌀, 옥수수에 이어 세계 4번째로 많이 재배되는 작물이지만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는 국가간 거래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바나나는 우리가 쌀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던 것처럼 간식거리가 아니라 주식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남미에서 바나나는 과거 '바나나 공화국(Republic of Banana)'이란 불명예스러운 말이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 기업의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바나나를 재배한다.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대량생산되는 바나나는 균일한 당도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상품으로 관리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식용 바나나는 열매는 맺지만, 씨 없는 작물이 되었다. 마치 종우나 종돈, 종마처럼 바나나 역시 우수한 품질을 갖춘 나무에서 씨 없이 뿌리나 줄기로 접을 붙여 번식시키는 방식(유전자 변형도 가해지지만)으로 품질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뜩이나 유전자 정보가 단순한 바나나인데, 유전자 종 자체가 이렇듯 단일하다는 데 있다. 이럴 경우 특정한 종에만 발생하는 전염병에 극히 취약한 구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약 바나나에 이 같은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인류가 미처 손써 보기도 전에 바나나란 과일은 지구상에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지구촌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의 좁아진 시공간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작지만 치명적인 전염병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세계의 산과 들판을 다니며 야생 바나나의 유전자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수한 품질과 상품성을 위해 다양한 유전자를 강제로 희생당한 바나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또 있다. 바로 지난 3월18일 국제법으로 효력이 발생한 문화다양성협약이다. 이 협약은 세계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국제협약으로 정식 명칭은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이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다자간투자협정의 틀로는 문화와 같은 비무역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각국이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자는 문화다원주의의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채택된 문화다양성협약은, 2006년 12월 전세계 30개국의 비준 완료를 통해 3월18일부터 국제법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문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 법안이 언제 비준될지는 감감무소식이다. 미국식 영어에서 '바나나'엔 '겉과 속이 다른 놈, 미국식 사고를 가진 동양인'을 가리키는 속뜻이 있다고 한다. 세계화 시대, 우리는 그 바나나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