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관광학을 전공하는 모 대학교수가 최근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파주영어마을을 찾았다. 1년 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레스토랑과 카페 등의 음식도 수준급일 뿐더러 외국인 종업원들이 영어로 서비스하는 모습을 접한 순간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해외 견학기회가 별로 없는 우리 학생들에게 국제화시대에 부합하는 최적의 견학코스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낭패스러웠다. 사람들로 한창 붐벼야할 시간대임에도 마을 전체가 썰렁했다. 또한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자장면·돈가스·어묵 등을 파는 동네 분식점 수준의 음식점들이 새로 들어섰으나 그나마 개점휴업인 집들이 많았다. 황당하다 못해 학생들 보기가 민망스러웠다고 토로했다.

국내에 영어마을 열풍을 몰고 온 파주영어마을은 시작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1천700억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국내 최대규모의 초호화 집단교육시설을 조성, 마치 영국의 여느 다운타운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런 탓인지 개원과 함께 교육 참가를 희망하는 신청자들이 폭주, 한때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자식을 캠프에 입소시키기 위해 학부모들이 '백'을 동원했다는 루머도 돌았었다. 당시 손학규 지사는 파주영어마을 개소 변(辨)으로 공교육 보완 및 사교육비 절감,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기회 불균형 해소, 해외유학수요 대체, 글로벌경쟁력 제고 등을 들었다. 덕분에 파주영어마을은 새로운 명물로, 경기도는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메카로 급부상하면서 경기도민들의 자긍심도 한층 제고되었다.

그러나 파주영어마을은 개원 1년여 만에 애물단지로 전락, 경기영어마을사업이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당초 경기도는 전체 입소인원의 20%를 저소득층 쿼터로 규정하고 참가비 전액을 도비(道費)에서 지원했으나 실제 저소득층 자녀의 입소비율은 4.8%에 머물렀다. 빈부격차에 따른 교육기회 불균형 해소는 공약(空約)으로 확인되었다. 영어마을 수업료 또한 동남아에서 연수를 받는 비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해외유학수요 대체효과도 없어 보인다. 2004년 8월 안산영어마을이 개원된 이후 도내 초·중·고교 조기유학생수는 오히려 급증했는데 이들 중 절대다수가 미국·캐나다·호주 등 영어권 국가로 유학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적자규모도 해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기영어마을은 개원 후 불과 3년 만에 455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방만경영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제는 또 있다. 김문수 도지사는 "불과 16%의 학생을 위해 출혈을 하는 것은 공공예산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영어마을 적자분의 혈세보전 중단을 시사한 때문이다. 이종서 교육인적자원부 차관은 "1년에 한 번 가서 며칠 동안 수업을 받는다고 해서 영어실력이 늘지 않는다"며 김 지사 측을 거들었다. 이에 대해 손 전 지사 측은 교육은 공공성이 우선하는 만큼 수익성을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반대논리를 펴고 있다. 영어마을의 미래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향후에는 지금과 같은 운영방식과 차별화될 가능성도 크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는 때문이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전국 도처에서 이와 유사한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해 설익은 공약들을 남발하고 당선 후에는 이의 실현에 올인한다. 유권자와의 약속이니만치 재검토 작업은 언감생심인 탓이다. 특히 후임 단체장이 전임자와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애물단지들이 종종 생겨나고 엄청난 규모의 세금이 낭비됨은 불문가지다.

변증법적 발전의 결과이나 목하 사회적 비용이 너무 크다. 업적지상주의에 매몰된 민선자치단체장들의 사려깊지 못한(?) 과욕이 초래한 비극이다. 선거철이 임박했다. 정치논리에 의해 아까운 경제적 자원이 더 이상 낭비되지 않도록 유권자들의 혜안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