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950년… 6·25가 발발했을 때, 나는 철없던 12살 소년이었다.

당시 우리집 논은 천수답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모를 못 냈다. 뒤늦게나마 비가 내려 온 식구가 새벽같이 늦은 모를 냈는데 나는 나이가 어려 못짐을 날랐다. 그때 들려온 소식…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내려왔다는 것이다.

내가 전쟁의 의미를 알건 모르건 나라는 난국(亂國)이 되었고, 우리 집안도 난가(亂家)가 되었다.

특히 당시 셋째 작은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미처 후퇴를 하지 못하고 수원 인근 고매리로 들어와 숨어 있어야 했다.

이를 눈치챈 이른바 치안대원들이 새벽 3~4시경이면 인민군들을 대동한 채 99식 장총을 메고 집에 몰려와 행패를 부리곤 했다. 이들은 내복차림의 아버지 어머니를 마당에 끌어내 두 손을 들게 한 다음 공포를 꽝꽝 쏘아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악질 반동분자 동생 놈을 찾아내지 않으면 모두 죽여 버린다!"

우리 가족은 극한의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협박은 2~3일 간격으로 계속되었고 우리 가족은 그때마다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원해야만 했다. 이런 지옥같은 날들이 계속되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적 치하에서 벗어나게 됐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겨울 1·4후퇴가 시작됐다.

이미 적 치하에서 곤욕을 치른 우리 가족은 공포에 질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곧바로 피란 보따리를 챙겼다. 그 추운 날 그야말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란길이 시작됐다.

걸어서 평택 '군문이다리'에 이르렀을 무렵 눈이 수북이 덮인 야트막한 둔덕에 짐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 둔덕은 시체더미였다! 군문이다리에 있던 피란민들이 폭격을 맞아 모두 죽은 뒤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한군데 모아놓았는데 그 위에 눈이 덮여 둔덕인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복잡한 피란길에서 아버지와 헤어져 이산가족이 됐다. 당시 돈을 모두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끼니를 굶어가며 남으로 남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공주까지 내려간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지자 어머니께서 길바닥에 앉아 떡장사를 시작하셨다. 식구들은 간신히 끼니를 이을 수 있었지만 당신께서는 자식들에게 모두 먹이고 난 죽 솥에 물을 부어 그것을 떠마시며 연명하셨다. 모두 7남매를 두셨던 우리 어머니는 43세에 세상을 뜨셨는데 아무래도 그때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끼니를 잇지 못하고 고생하셨던 후유증인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호국보훈의 달 6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6·25를 겪지 않았던 젊은 세대는 단순히 역사 속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6·25는 분명 진행 중인 역사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상태이고 철조망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고 있다.

다시는 6·25같은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호국 영령들은 절대로 그런 비극을 원하지 않는다. '꽃잎처럼 스러져간' 호국영령들의 교훈을 젊은이들이 되새겨 봤으면 하는 안타까움에서 이 노래 가사를 소개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여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를 들으면서 아직도 비감에 젖을 수밖에 없는 나에게 있어 6·25는 '현재 진행형'이다!

/홍 기 헌(수원시의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