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割讓)받았다. 일본은 통치자료 확보 차원에서 곧바로 지적제도 확립에 나섰고, 이 지적제도가 1973년까지 대만 지적체제의 근간을 이뤘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제의 낙후된 지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이, 대만 역시 일제의 도해(圖解) 중심의 지적체제로 70여년 동안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해야만 했다.
결국 대만은 1973년 지적재조사 사업을 시작, 현재는 사업완료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물론 지적재조사 사업의 예는 대만 뿐만이 아니다.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은 물론이고 낙후된 지적을 식민지에 이식한 일본마저 이미 1951년 특별법을 통해 근대적 지적제도 확립에 나섰다. 지적재조사 사업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가고 있는 이 때, 이들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시사점을 알아본다.
▲중앙정부가 재조사 비용은 전담=주요 선진국들이 엄청난 예산과 수십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지적재조사 사업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행정의 기본이 되는 근대적 지적제도 없이는 행정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1923년 스위스를 시작으로 네덜란드(1928년), 프랑스(1935년), 일본(1951년), 대만(1973년) 등은 20세기 들어와서 근대적 지적제도 확립에 나섰다.
하지만 사업이 시작된지 수십년이 됐지만 이들 나라의 성과는 각국별로 다르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이미 근대적 수치지적으로 탈바꿈한 반면, 독일은 주에 따라서 여전히 사업의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지역마저 존재한다. 일본 역시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까지 전 국토의 48%밖에 사업을 완료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을 '국가의 부담 정도'에서 찾았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은 사업비용의 100%를 국비로 처리한 반면 일본, 독일 등은 관련 비용을 지방정부 및 관련 단체 등에 전액 또는 절반 이상을 떠넘긴 것이다.
한국토지공법학회 이현준 사무간사는 "지방정부 간에 재정자립도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방정부의 과도한 사업비 부담은 사업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며 "국비 100% 부담이 어렵다면 최소한 낮은 재정자립도를 보이고 있는 지방정부에는 특별 교부세 등을 통해 지원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업기간을 단축시켜 오히려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이다"고 말했다.
▲중재에 적극적인 국가기관=지적재조사 사업에 나선 모든 국가들의 핵심적 장애물은 불부합지 처리문제다.
토지경계의 불일치와 면적의 증감에 따른 민원 발생으로 사업 기간 및 비용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감사원이 지적재조사 사업중단이라는 권고조치를 내린 핵심적인 이유도 이로 인한 소송비용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별법을 통한 '조정위원회'제를 신설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일본과 대만의 예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사업진척률이 저조한 일본의 경우에는 예산절감 등을 내세워 경계 문제 발생시 당사자 해결원칙을 고집하고 있다. 반면 90% 이상을 완성한 대만은 관련 문제 발생 때마다 관할 행정기관(시·현)이 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면적 증감 발생시에도 정부가 직접 청산 작업에 나섰다. 일정 기준 이상 면적이 증가한 경우에는 해당 토지를 국유지로 환수하는 대신, 면적이 줄어든 소유주에게는 이를 보상해 준 것이다.
이는 몇 푼의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당사자 해결주의를 고집하는 한 오히려 관련 사회적 비용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일본의 실패는 교훈=전문가들은 특히 일본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것을 주문했다.
지적재조사 사업은 장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전문적인 사업이다. 하지만 일본의 잦은 공무원의 인사이동은 사업의 연속성과 전문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업무 분담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진 지적 사업의 이원화(국토교통성 및 법무성)도 오히려 행정의 통일성을 저해했다. 여기에 토지조사 결과를 조사기관이 아닌 법무성이라는 별도의 기관이 유지토록 해 지적자료의 갱신과 관리에도 별도의 행정력을 배치해야만 했다.
지적의 낙후로 관련 학과의 인기가 하락, 전문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