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도현(시인)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늘어났는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급격히 줄었다. 컴퓨터 탓이다. 학생들이 꽤나 정성들여 제출한 리포트도 사정이 다를 거 없다. 글씨체가 너무 조악해서 봐줄 수가 없다. 우리의 교육과정도 글씨 잘 쓰는 공부는 제쳐둔 듯하다. 이대로 방치하면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이 땅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육필이라는 말은 매우 고색창연한 말이 되었다. 글을 '치는' 게 아니라 '쓰는' 작가는 이제 극소수다. 문인들의 육필 전시회에서 본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원고를 잊을 수 없다. 그분의 원고는 원고지 칸을 또박또박 채운 게 아니라, 백지의 여백을 빈틈없이 메운, 무슨 추상화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백지를 메우고 있는 것은 정말 깨알처럼 촘촘하게 들어박힌 글자들이었다. 글자 하나가 얼마나 작은지, 그러한 '좀팽이' 글쓰기가 경이로워 나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가서 내가 맨 먼저 배운 '문학'은 선배들의 글씨체를 흉내 내는 일이었다.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는 만년필로 아주 예쁘고 멋진 글씨를 썼다. 함부로 흘려 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모범생의 필체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문학청년의 냄새가 나는 글씨였다. 그 필체를 연습한 덕분에 나는 그 선배의 귀여움을 톡톡히 받을 수 있었다. 그 선배의 필체는 참으로 희한하게도 나를 거쳐 몇 해 동안 내 후배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글씨를 통해 원고정서법뿐만 아니라 문학청년으로서의 자세를 배웠다.

습작 시절에는 글씨 못지않게 어떤 원고지에다 글을 쓰는가 하는 것도 우리들의 매우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흔히 붉은 줄이 쳐진 원고지는 첫 번째 기피 대상이었다. 우리는 뭔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특정한 기관, 출판사나 신문사 이름이 찍힌 원고지를 손에 들게 되는 날은 대단한 문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원고지와 육필의 시대는 그 빛나던 야성을 잃었다. 가끔 문예작품 심사를 하다가 보면 그런 필체와 그런 원고지를 만날 때가 있다. 인쇄한지 좀 오래된 듯 원고지의 모퉁이가 바랜, 아주 유려한 만년필 필체로 정성을 들인 원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원고에 쓰인 언어는 수십 년 전의 정서와 감각에 머물고 있기 십상이다. 세상으로 나가야 할 시기를 놓친 원고를 옆으로 제쳐두면서 나는 원고지라는 형식의 종말을 쓸쓸히 지켜보곤 하는 것이다.

나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그동안 여덟 권의 시집을 냈다. 첫 시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타자기나 컴퓨터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타자기와 달리 무진장 지웠다가 다시 쓸 수 있는 신비한 기능에 그만 매료되고 말았다. 시 한 편을 쓸 때 보통 수십 장의 파지를 내던 나는 서슴없이 글을 '치는' 쪽에 줄을 서버렸다. 문명의 편리함을 쫓은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필체가 시원찮은 시인이 되었다.

글씨를 쓰지 않으면서 우리는 우체국에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원고 마감 시간 직전에 몇 번의 클릭으로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랄 만큼 편리해졌으나 이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작 석 줄밖에 안 되는 졸시 '너에게 묻는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가 전문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제목이 '연탄재'로 바뀌는가 하면 수많은 변종들이 생겨난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모든 국민이 다 서예가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어라는 글자 고유의 조형미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너나없이 책꽂이에 꽂아두던 '펜글씨 교본' 같은 책을 다시 우리 학생들의 손에 쥐어줘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