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건영 (논설실장)
1960~70년대 한참 배고프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외국으로 갔다. 독일로 간 광부 간호사들을 비롯,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대거 미국으로 떠난 이들이 그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타국에서 찾은 일거리는 흔히 '위험하고(Dangerous) 지저분하고(Dirty) 힘들다(Difficult)'는 이른바 3D업종이었다. 국내에선 3D나마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3D보다는 백인들의 차별과 멸시였다고들 한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온 황색인들을 백인들은 꽤나 별스럽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던 우리도 좀 살만하게 되자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아무리 열악해도 일자리만 있으면 좋겠다던 우리였지만, '언제 그랬나'싶게 3D라면 고개부터 내젓는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게 바로 코리안드림을 좇아 대거 몰려든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그런데 세상 인심은 참 묘한 것인듯, 그 옛날 우리가 타국에서 받던 서러움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갚아주기로 작심이라도 한 것 같다. 그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왔고 상당수 불법 체류자란 약점을 이용, 형편없는 저임금에 체불마저 다반사다. 상습 구타 성폭행에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강요하기도 한다.

농어촌 중심으로 국제결혼이 늘면서, 외국인 배우자 및 그들 자녀인 혼혈아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또한 심각하다. 외국인 신부들의 경우 대다수가 농촌을 기피하는 한국 여성들의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 베트남 몽골 등 가난한 아시아 출신들이라 해서 멸시하는 경향이 짙다. 생긴 모습과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 말이 서툴다며 따돌림 당하기 일쑤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따돌리고 툭하면 폭력을 휘두른다. 참다 못한 이혼이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만 4천쌍 가까이나 갈라섰다. 3년 전보다 4배나 늘었다 한다.

국제결혼에서 태어난 혼혈아들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또래들 따돌림이 심해 어머니 고국으로 보내버렸다는 부모도 적지않다. 이런 분위기에선 이 아이들이 컸을 때 취업마저 어려울 거라며 벌써부터 걱정들이다.

지난해 4월 한국계 미국 프로풋볼(NFL)스타 하인스 워드가 방한했을 때 한국 거주 외국인 및 혼혈인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졌었다. 매스컴마다 그들의 애환을 다루면서 각계에서 개선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와 정치권도 서둘러 그들에 대한 갖가지 지원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1년여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들이 느끼는 '차별 온도'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호소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란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그 많던 대책들은 다 어찌된 것인지 모르겠다.

한국 거주 외국인이 72만여명으로 전체 인구의 1.5%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년보다 35%나 급증했다 한다. 덩달아 혼혈아도 크게 늘고 있다. 불과 3년후면 '코시안 초·중·고교생'이 10만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 농어촌 초등학교 교실의 4분의 1은 이들이 채우리란 전망이다.

싫든 좋든 이제 우리도 다인종 다문화시대로 접어들었다. 언제까지 단일민족 단일문화권만 강조할 때가 아니다. 외국인 혼혈인을 동등한 공동체 일원으로 보듬는 인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차별당하고 멸시당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 사회는 안정될 수 없고 건강할 수 없다는 원론적 이야기를 새삼 강조하고 싶진 않다. 그들이 못견뎌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 나라에서 우리를 어떻게 여길까부터 생각해보자. 거꾸로 우리가 그들 나라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또 어떨까도….

베푼만큼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상생을 도모할 때 그들은 물론, 그들의 고국도 우리를 보듬을 것이다. 그들 외국인을 더 이상 타인으로 보지말고, 그들이 바로 우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혼혈아들 역시 다름 아닌 우리의 자녀란 걸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