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우리나라 정당사상 대선 후보 경선은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56년 3월 28일 민주당이 처음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는 쉽게 결정됐다. 유력한 후보의 한사람인 유석 조병옥이 정권 교체의 밀알이 되겠다며 출마를 포기하고 정·부통령 후보에 신익희·장면을 추대한 것. 다만 일부의 주장으로 부통령 후보만 경선했다.

그후 제1야당은 국민에게 두차례에 걸쳐 멋진 대선 후보 경선을 보여줬다. 하나는 1959년 11월26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유석을 지명한 것. 신구파가 치열한 접전속에 투표 결과, 유석이 재적 대의원(966명)의 과반수보다 한표 많은 484표로 장면을 누른 것이다.

하지만 유석이 "한표 차 당선으로는 국민에게 면목이 없다"고 사퇴 의사를 밝히자 장면은 "한표 차 당선도 엄연한 당선이다. 나는 유석의 당선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해 감동을 주었다.

11년뒤인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의 주류로서 당선이 예상됐던 김영삼(YS)이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미달됐고 2차 투표에서 김대중(DJ)이 반주류 세력의 지원으로 역전승,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이때 YS는 "DJ의 당선은 곧 나의 당선이다. 본선 승리를 위해 전국을 뛰어다니겠다"고 선언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선거운동에 적극 나섰던 장면과 YS가 훗날 내각제하의 국무총리와 대통령이 됐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물론 경선 불복의 어두운 기록과 그림자가 있다. 1997년 이인제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뒤 공언을 어기고 신당을 창당, 출마하여 경선 불복의 대명사처럼 됐다. 또 이종찬은 1992년 민자당의 경선을 앞두고 YS가 전국 합동유세를 반대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불참한 바 있다.

어제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오는 12월 19일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내세울 공식 후보로 이명박 예비후보를 선정, 지명했다. 길게는 1년2개월, 공식적으로는 지난 한달동안 많은 국민과 당원들의 관심속에 4인의 출마자중 2인의 유력 후보가 치열하게 접전을 벌인 끝에 대통령 후보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날 새대통령 후보의 탄생 못지않게 관심을 모은 것은 차점으로 패배한 박근혜 예비후보가 새 후보의 당선을 축하하고 오는 대선에서의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오는 대선을 겨냥, 15대(1997년) 16대(2002년) 대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든후 정권 탈환-잃어버린10년 되찾기를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유력 경쟁자인 이명박·박근혜 두 주자간에 시간이 지나면서 정책과 공약의 제시·경쟁보다 흠과 상처를 찾는, 소위 검증 공방이 과열되자 당안팎에서는 당이 깨지는게 아니냐, 갈라서는게 아니냐, 경선이 불발되는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물론 주자들은 강재섭 당대표 주재의 몇차례 모임에서 경선 결과의 승복을 다짐했다. 또 13차례 지역별 합동유세 때마다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당선자 중심으로 화합협력할 것"을 확약했지만 과연 이것이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에 의구심을 증폭시켰던게 사실이다. 사실은 한국의 정치 문화는 대소선거·경선후 모든 감정의 앙금을 깨끗이 잊고 손을 잡는 노력이 매우 부족하다. 필자는 여기서 대선 후보 경쟁을 뜨겁게 벌인후 결과에 따라 승·패자가 손잡았던 부통령 후보로 러닝메이트가 됐던 미국의 예를 떠올리고자 한다.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1960), 존슨과 H·H·험프리(1964년),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1980·1984년)의 예가 그것이다.

경선의 미학은 승자의 아량과 포용, 패자의 협력이다. 깨끗한 경선 승복은, 승패자간의 손잡기는 당의 화합과 전진을 도모하고 국민의 신뢰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경선 불복은 당장은 감정과 불만풀기가 쉽고 모든 게 정당한 것 같지만은 두고두고 돌아오는 것은 배신과 국민불신이다. 이제 국민과 당원들은 그동안 승자와 패자가 스스로 쏟아내고 공약한 승복 약속을 얼마나 성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할 것인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