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가상의 '번둥시', 유일한 산업은 번개충전에 의한 전기생산이다. 번개충전에 성공하면 수천억원 가량의 전기의 주인이 되어 인생이 바뀌고 실패하면 목숨을 잃는다. 이는 획일화된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우리 사회에 대한 신랄한 도전이고 유쾌한 풍자이다. 이 도시에서는 일확천금을 좇는 사람들의 무모한 투기만이 현실이다.
당국은 이를 금지하지만 '금지를 위한 법'이란 때로 '금지'보다는 '관리'를 목적으로 하게 마련, 당국은 '번개충전금지법'을 제정하여 한편으로 번개충전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한편으로는 번개충전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여 '최고의 병원'에 별도로 수용한다. 자신의 출신지를 모르는 소년 정훈은 번개충전과 무관했으나 억울하게 경찰에 끌려온다. 그리고 생체전기가 흐르지 않는 '특별한' 인간임이 밝혀지고 이 특별함 때문에 '번개충전'이 불가능한 인간으로 분류되어 각종 사회적 부적응자들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마지막 처리장, '최고의 병원'에 감금된다.
'최고의 병원'은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의 원천이다. 이는 오늘날, 종합병원의 기원이 된 오삐딸 제네랄(Hopital General)을 연상케 하는 바,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판정된 다양한 구성원이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분리·감금되었다. 이때 제시되는 가장 강력한 정상·비정상의 기준은 대공장의 기계 그 자체였다. 오삐딸 제네랄에는 '최고의 병원'과 마찬가지로 규율을 무시하거나 어기는 범법자, 부랑자, 장애인, 정신질환자가 수용되어 있었고 도대체 같은 차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기계의 종속물로서 기계의 속도에 맞춰 일할 수 없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생체전기가 흐르지 않아 번개충전을 할 수 없는 정훈이 쓰레기 집합소, '최고의 병원'에 수용되고 여기에 난무하는 폭력은 이 같은 정상·비정상의 기준이 여전히 현재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정훈은 부조리한 현실에 끝없이 도전하고 그의 활약으로 모든 비정상인을 개조할 수 있다고 믿는 번개인간은 제압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수용자들의 상호부조와 협력의 가능성은 또하나 새로운 희망이다. 물론 한 명의 잘못을 단체에 가하는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전 시대의 단체기합이 연상되어 영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진의를 의심스럽게 하지만.
그러나 때로 한 국면의 해결은 또다른 분쟁과 폭력의 기원처럼 보이고 진보와 퇴보, 진실과 정의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기 일쑤다. 정훈이 찾고 있는 정체성이란 이 모든 마장을 넘어 이룩되는 것일 터이다. 다시 쓰레기장으로 보내질 운명에 처한 정훈이 앞서 그래왔듯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지난할 정훈의 앞길에 축복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아울러 그 길에서 이 작품이 지닌 여러 한계와 미숙함을 넘어 더 멋진 작품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