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북한의 물난리 피해 수준이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다. 600여명의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피해 예상 규모가 늘어나면서 국제구호기관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사정이 다급한 모양인지 올 8월1일부터 10월 중순까지 공연할 예정으로 있던 집단체조 아리랑 공연을 일시 중단하였다고 한다.

남한뿐만 아니라 국제 구호기관의 도움으로 이렇게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연명하는 것은 별반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조금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1995년 북한의 대기근 이래로 대북지원을 해 오고 있는 미국의 국제단체 머시코(MercyCorps)의 공동창업자인 엘스워즈 컬버의 미망인 에스머 조 컬버씨는 지난 6월 북한을 방문한 뒤 한 사이트에 "끝 간데 없이 저 멀리 산언덕으로 이어지는 눈과 배추, 옥수수밭들에서 풍요를 본게 아니라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지쳐버린 땅을 알아챘다"는 내용의 안타까움을 표한 바가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북한에서는 가능한 모든 땅을 경작지로 만들어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산림의 황폐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산림은 모두가 국유림이기 때문에 남획이 불가피하다. 사유림과 달리 우선 먹고 사는 일이 급한 사람들 입장에선 벌목 등이 유행하기 때문에 나무가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국민들을 먹여 살릴 수 없는 국가들은 대부분 산림의 황폐화와 같은 일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조선왕조가 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러나 조선왕조 역시 국민들을 먹여 살릴만한 생산력을 잃어간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왕조가 자체적으로 국가로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라는 점에 대해서 실증경제사학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서울대의 이영훈 교수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대한민국 이야기'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의 환경이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간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지만 이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개간을 하기 시작한다. 또한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장작용 나무를 베어내게 된다. 그렇게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19세기 말엽이 되면 북부 고원지대와 강원도의 깊은 산속을 제외한 전국의 대부분 산지가 심하게 헐벗은 상태가 된다. 이영훈 교수팀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18세기 중엽에 비해 19세기 말까지 토지생산성은 거의 3분의 1수준으로 떨어졌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조선왕조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 농가에 각종 조세를 중과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840년대에 전국 곳곳에 민란이 생겨나게 되고 조선왕조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거의 와해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19세기 초반 정약용 선생의 형님인 정약전 선생이 남긴 '송정사의'라는 책을 보면 당시의 산림 피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유지 산에는 소나무가 한 그루도 없게 되었다. 작은 공동 소유의 산에도 소나무 한 그루 없게 되었다. 모두 민둥산이 되었다. 세 가지 우환 때문인데 첫째는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저절로 자라는 나무를 꺾어서 땔나무로 쓰는 것이요, 셋째는 화전민에 의해 불태워지는 것이다."

지금의 북한 상황은 조선조 말기와 거의 차이가 없는 상황이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계속되는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주민을 돕는 일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언제까지 햇볕정책이란 이름으로 이런 체제를 연명하는데 세금을 들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북한의 식량난은 1991년부터 본격화되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북한 주민 200만명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5년이 훌쩍 지나가버린 지금까지도 북한이 스스로 자구책을 찾기 위해 가시적인 개혁 개방을 실시한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정책에 대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