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외쳤건만 그 메아리가 돌아오기도 전에 '간첩'이란 올가미가 옭아맸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고비고비마다 중심 추 역할을 해 온 죽산 조봉암은 역사의 전면에서 그렇게 사라져야 했다. '혁신 정당' 진보당과 함께.
죽산의 사형이 잘못됐다는 국가기관의 판단이 나오는 데 꼬박 48년이 걸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지난 달 죽산을 사형에 이르게 한 진보당 사건을 '정치 탄압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정부에 피해자와 유가족에 사과하고 그 피해 구제와 명예회복, 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인정 등을 권고했다.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사형집행 직전의 유언으로 우리사회의 민주화 투쟁을 예언했다.
"이 박사(이승만)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했고 나와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그 뒤로 48년, 과연 그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진보당 사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좌우 이념 갈등이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0일 오후 2시 강화군 강화읍 농협중앙회 회의실.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 사업회 발기인 모임이 열렸다. 기념사업회는 이 자리에서 앞으로 죽산 명예회복단체와 연대해 본격적인 추모사업과 기념사업 등을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사법 살인'을 가능케 했던 법원 판결을 뒤집어 달라는 재심도 곧 청구하겠단다.
경인일보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죽산 조봉암 명예회복 권고결정을 계기로 '죽산 되살리기, 이제부터'란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인천과 죽산, 고단했던 가족의 삶, 죽산의 정신, 여전한 이념 대립, 그동안의 죽산 조명사업과 앞으로의 전망, 전문가 방담 등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