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죽산 조봉암이란 걸출한 인물이 인천 강화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란 얘기가 많다.

죽산이 태어난 강화는 역사적으로 저항정신이 뿌리깊게 밴 곳이고, 그가 청·장년기를 보낸 인천은 해방공간에서 좌우 이념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죽산의 항일정신이 싹튼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그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고, 다시 좌우합작에 나서고, 민족의 평화통일을 외치게 된 것은 인천의 지리·역사적 환경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3면>

조봉암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에서 있었던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3·1운동의 한가운데 조봉암이 있었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것을 기화로 죽산을 죽산이게 하는 정신의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은 나로 하여금 한 개의 한국 사람이 되게 하였고, 나를 붙잡아서 감옥으로 보내준 일본 놈은 나로 하여금 일생을 통해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애국 투사가 되게 한 공로자였다."

해방을 감옥에서 맞은 조봉암은 그날 밤에 인천보안대를 조직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신병인수는 여운형이 했다고 한다. 죽산은 해방 사흘 뒤엔 인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다. 47세 때의 일이다.

이듬 해인 1946년은 조봉암 사상적 측면에서 극과 극을 달린다. 그것도 인천에서 생활할 때다. 그 해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에 뽑힌 죽산은 5월에 사임한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란 공산당과 자신을 비판한 글이 신문지상에 게재된 직후다. 이 글에서 조봉암은 해방 이후 1년여 동안 인천에만 머물며 공산당 조직과 노동, 정치 문제 등에 대해 열심히 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죽산은 이 뒤로 반공노선을 걷는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두 번의 국회의원을 인천에서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한 그의 길지 않은 인생역정과 정신은 '인천'이란 토양과 '죽산'이란 재목이 잘 맞아떨어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