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국민의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 이제 나의 역할은 끝났다. 정치와 영원히 결별할 것이다."

1984년 11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부통령 후보(제랄딘 페라로)를 러닝메이트로 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패배한 월터 몬데일 전 부통령이 한 말이다.

"패배를 인정한다. 정계에서 은퇴하겠다. 앞으로 김영삼(YS) 새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1992년 12월 19일 새벽 14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민주당의 김대중(DJ) 후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대국민성명을 냈다. 대권도전 3패에 아쉬움과 통분을 억누르며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날부터 모든 언론들은 (그를 싫어하고 반대했던 언론까지) '한국정계의 거목' '진정한 지도자' '이 시대의 뛰어난 정치인' 등이라고 추기고 칭송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 언론 정치권 등은 DJ의 깊은 생각과 속셈을 간과했다.

당적을 지닌 채 캠브리지대학에 가서 수학하고 귀국, 동교동에 칩거하면서 민주당을 알게 모르게 지휘했다. 1995년 제1기 전국지방선거를 앞두고 YS는 "DJ는 이제 끝났다. 신경쓸 게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DJ는 지방선거와 관련하여 공천에 개입, 여당인 신한국당을 패배케 한 후 돌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대표가 되면서 슬그머니 정계에 복귀했다. YS의 국정운영의 실패를 좌시할 수 없어 복귀했다는 것이다. 이때쯤 그에게 붙여졌던 '거목' '위대한 지도자'란 표현도 동시에 사라졌다.

이듬해 총선거를 치러 세력을 늘린 DJ는 71세때인 1997년 15대 대선 때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출마, 이회창을 꺾고 당선됐다. 도전 4수(修) 만에 대망의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이다.

"저는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패배를 인정, 깨끗이 승복합니다. 제가 부덕하고 불민한 탓에 오늘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국민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심정입니다…."

16대 대선의 개표가 끝난 2002년 12월 20일 상오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승복·자성·정계은퇴를 선언했다. DJ에게 패배한 후 5년 동안 와신상담했으나 결국 2연패한 것이다.

선거 50여일을 앞둔 요즘 이회창 전 대표의 대선출마 여부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는 지난 정초에 "내 처지에 대선을 놓고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현실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치상황이 격변하고 여기저기에서 출마요구가 거듭되자 고민하고 있고 또 출마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골수지지세력 등의 출마요구의 목소리가 높아가자 불출마 천명에 변함은 없으나 정권교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심 중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이 전 후보로서는 15대 대선 때도 그렇고 특히 16대 때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 논란과 관련한 김대엽 소동과 노무현·정몽준의 후보단일화 파문 등에 의한 연패가 너무나 분하고 아쉬울 것이다. 72세라는 고령과 3번째 출마가 큰 부담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출마·당선 때 73세였던 이승만 대통령과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 71세의 DJ, 70세의 레이건 등이 위로가 될 수 있다. 여기에다 네 번 도전에 성공한 DJ, 3번으로 성공한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의 예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혹시나 범여권이 예고한 결정적인 한방에, 또는 각종 의혹혐의 공세에 도중하차할 경우 보수쪽의 대타자로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 있다고 맹목적인 충성파 추종세력들이 부추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헌법상 일정 요건을 갖춘 국민은 누구나 대선출마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 전 후보는 시대도 나라 안팎의 상황도, 대다수 국민의 생각도 바뀌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5년 전 참으로 마음은 아프고 쓰렸겠지만 깨끗이 인정·승복·은퇴하겠다는 초심·결심에 흔들림이 없이 자중·자제·자애할 것을 당부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멋진 승복·퇴장 약속을 지키는 기록을 남겨줄 것을 기대하고 싶다. 국민들은 이 전 후보의 이성적인 결단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