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자기만이 가장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장담했다가, 중간에 콱 막혀 울고 말았다는 옛 시인의 일화가 생각난다. 고려 때 사람 김황원(1045~1117년), 그는 당시 이름깨나 날리던 시인이었다. 그가 어느 봄날 대동강변 부벽루에 올랐다. 맑고 푸른 강물, 그 한가운데 길게 떠있는 능라도 버들빛, 강 건너 들판의 넓고 아득한 경치가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한참 절경에 취해 있던 그의 눈에 정자기둥 여기 저기 써 붙인 글귀들이 들어왔다. 앞서 왔던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 아름다움을 읊은 시를 종이에 써 붙인 것들이었다. 한데 그에겐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 글들을 모두 떼어냈다. "내가 가장 멋진 글을 짓겠다." 자못 호기롭게 종이와 붓을 꺼내들고 단숨에 써내려갔다.
"긴 성 끼고 흐르는 강물 넓기도 하여라 /강 건너 아득한 벌 동쪽엔 점 찍은듯 까맣게 산 산 산…." 그러나 거기서 그만 붓이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글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절경이었던 탓이리라. 온종일 붓을 들고 생각했지만, 다음 글귀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분하고 서럽고 또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끝내는 붓을 던져버리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한다.
오직 자기만 일류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기염을 토하는 대선후보들. 하긴 대통령이 되겠다면 그만한 포부와 자신감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포부와 자신감만으로 한 나라를 이끌 수는 없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와 연구가 따라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 또한 갖춰야 한다. 그런 것들도 없이 운좋게 대통령이 됐다가, 임기가 다 끝날 때쯤 돼서야 "사실은 대통령 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실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황원처럼 통곡으로 끝낼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 각 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벌써부터 걱정되는 것들이 꽤 눈에 띈다. 각종 세금 대폭인하, 교육예산 수십조원 증액, 교육 직업 주거 노후 대폭지원 등등….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절실히 필요하긴 한데 하나같이 엄청난 재원이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정작 재원조달 방안들은 불투명하다. 근로자 정년 연장이나 일자리 수백만개 창출 등도 심각한 청년실업과 최근 몇 년의 경제성장 둔화를 생각하면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오죽 공약들이 미심쩍었으면 재계가 다 나서, 차기정부 정책과제들을 제시했을까 싶다.
그런 걸 후보 자신들도 느꼈던 것일까. 이젠 아예 정책대결이나 비전 제시 등은 뒷전이고, 서로 상대방 헐뜯기로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주가조작범 땅투기범 박스떼기범 패륜아 친일파후손이라는 등등…. 거의 너 나 없이 후보들은 흠집투성이에 범죄자들 뿐인 것만 같다. 심지어 국회 국정감사마저 후보들 범죄사실 확인장인지, 피감기관 감사인지 모를 정도가 됐다. 여기에 '서부벨트 단합론' '호남·충청 연대론' 등을 거론하며 지역주의 망령을 되살리기에 급급하기도 하다.
후보들의 호언장담과 온갖 행태들을 보면서 김황원을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그런 자세들로 과연 그 눈부신 포부들을 실현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김황원은 단지 시의 끝을 못 맺어 통곡하며 돌아섰지만, 이런 이들의 실책은 통곡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칫 나라와 국민 모두를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도 있다.
그래서 국민은 불안하다. 선거일이 반백일도 안 남았지만, 이제라도 철저히 연구하고 준비해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며, 정정당당하게 겨뤄주기를 국민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