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현 (경기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
역시 이번에도 그들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지난 29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그들은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의 제보를 근거로 삼성의 비자금 내용을 폭로했다. 좋은 말로 비자금이지 온갖 추잡한 기업의 부정과 불법 덩어리를 일컫는 말 아닌가? 전직 특수검사 출신 법무팀장의 명의로 개설된 3개의 차명계좌와 약 50억원으로 추정되는 괴자금이 본인도 모르는 계좌를 통해 관리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성에서는 개인적인 일로 폄하하고 있지만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무엇보다 제2, 제3의 추가폭로를 예고한 상태에서 이번 사건은 여러 면에서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

우선 이를 폭로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대단하다는 점이다.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칭하며 선거운동을 하는 얼빠진 종교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1974년 서슬퍼런 군부독재 권력에 굴하지 않고 '유신헌법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발표하면서 출발한 사제단은 20년 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폭로를 통해 민주화 물꼬를 튼 민주화를 위한 정신적 지주였다. 이후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언론과 인권, 통일 등의 운동을 펼치며 민중들과 함께 했던 그들이다. 그런 사제단에서 "삼성과 검찰은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굉장한 뉴스감이다.

또한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단순치 않은 위치다. 삼성그룹 재무팀과 법무팀에서 7년 동안 전무급 팀장으로 근무했던 사람이다. 삼성에 가기 전 특수부 검사시절에는 '전두환 비자금'을 찾아내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가난한 검사를 벗어나려고 지원했던 삼성에서 수십억원의 재력가가 될 만큼 이젠 돈에 궁색한 사람도 아니다. 7년 동안 몸담았던 삼성에서의 행적을 "중요 범죄 업무 종사자였다"라고 고백하는 그의 비장한 표정에서, 삼성의 긍정적인 변화를 바라는 고백의 진정성이 더 설득력 있다.

이번 김 변호사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이 무척 이채롭다. 먼저 자신의 계좌이지만 자신이 확인할 수 없는 이른바 '관리계좌'라는 존재다. 이는 은행과의 공모가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삼성의 구조적 비리를 은폐 또는 비호하는 역할을 맡았던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의 구체적 역할이 드러났다. 멀쩡한 법조인을 데려다가 공범자로 만드는 그런 역할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폭로된 내용으로 보면 적어도 횡령배임, 조세포탈, 금융실명제법, 위증교사 등 7가지의 죄목에 걸려들게 된다. 이건 기업이 아니라 범죄 집단이다. 세계 최초의 기술 개발도 좋고 수출 효자 노릇도 좋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처럼 이번 사건은 언론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요소들을 고루 갖췄다. 국민적 신뢰를 받고 있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준엄함과 국내 최대기업의 최고위층에 몸담았던 전직 특수부 검사의 폭로라는 그 짜릿함이다. 그러나 자사의 가치에 따라 천차만별을 보인 전국지들의 보도 태도는 차치하고 경인지역 일간지들에서는 한 줄 기사도 찾기 힘들다. 찾기 힘든 생색내기 기사지만, 삼성과 불가분 관계의 중앙일보도 이를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점잖은 훈계조의 사설로 사회적 파장을 고려했다.

이 정도 의제면 한 줄 보도 정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동안 보도했던 삼성 비정규직 노조 투쟁, 생색내기 기부금으로 인한 지역민들의 불만도 중요하다. 비자금 폭로를 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한 줄 보도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삼성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안 하는 건가, 못하는 건가? 더구나 수개월 전 삼성의 치부를 과감히 보도하여 찬사를 받은 적 있는 경인일보의 저널리즘의 진정성도 이럴 때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아닌가? 스스로 환부를 도려낼 능력마저 상실, '역기능 임계점'에 도달한 삼성의 구조적인 결함을 과감히 지적해 내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광고와 협찬, 후원으로 지원해준 삼성에 대한 언론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