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자들에게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들려주고 싶다.
조선의 실학자 최한기라는 이는 당시 연경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오는 서학(西學)에 관한 책을 모으기 위해 집까지 팔 정도였다. 그는 장안의 책들을 모두 모았건만, 그가 죽고 난 후에 많고 많던 그의 책은 어디로 흩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서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도서관은 무려 2천개에서 3천개에 달했다. 도서관은 공적인 공간이다. 최한기의 책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는 것은 조선 후기 지식사회는 사적인 공간이 지배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현재에도 한국의 도서관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어디로 갔을까? 최한기가 죽고 난 후에 최한기의 책들이 안개처럼 흩어진 것처럼, 이순신의 거북선도 사라져 버렸다. 해외에 나가서 그 나라의 해양박물관들을 세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도대체 한국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가 맞는지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는 이렇다. 오로지 '해가 중국에서 떠서 중국으로 진다'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양에서 연경까지 육로로만 다녔다. 물론 대동강과 압록강들도 포함되었겠지. 그들은 바다로 나갈 일이 없었다. 해양으로의 진출은 중인이나 평민들이나 할 일이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은 무역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팔짱을 끼고 남의 일이라고 치부했다.
15세기에 이베리아 국가들이 대항해를 시작한 이래로 유럽 각국들이 앞다투어 탐험을 위해 세계 지도와 각종 측량 기구들을 제작하는 등 해양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동안,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로지 육로로 연경을 다니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만 찾아다녔던 그들에게 바다는 무역의 공간이 아니라, 답답한 벽에 불과했다. 실학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학자들은 바다를 통해 중국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약용도 일본을 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쳤지만, 그의 예측은 불행히도 빗나갔다. 왜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을까?
세계적인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말했다. "눈으로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사람(여기서는 중국과 조선이다)들은 왜 바다로 진출하지 않았을까?" 사실 1421년에 명(明)나라의 정화는 대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진출했었다. 이는 유럽의 대항해 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크게 평가된다. 하지만 정화의 이런 항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명나라는 더 이상 바다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주지하다시피, 명을 숭상했던, 조선의 송시열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은 소중화(小中華)의 깃발을 내걸었다. 중국이 바다로 나아가지 않는데 조선이 바다로 진출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현재 선진국가들은 예외없이 모두 바다로 일찍 진출했던 나라들이다. 한국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출발이 400년이나 뒤늦은 게임. 연평도 앞의 작은 바닷길을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도 그 바닷길의 경계를 두고 싸우는 형국을 보면서, 오대양으로 한없이 뻗어 나가면서 세계를 주름잡았던 유럽인들의 역사를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