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35)은 독특한 개성의 여배우다.

   다른 한국 여배우들은 한 번도 밟기 힘들다는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니스, 베를린)의 레드카펫을 그는 모두 밟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지금까지 필모그래피(filmography)를 보면 '박하사탕'(1999), '섬'(2000), '녹색의자'(2005), '경계'(2007) 등 대부분이 이른바 작가주의 성향의 영화였고, 대부분 국제무대에서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함께 작업해온 감독 역시 이창동, 김기덕, 장률 등 상업주의 영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성향인 것 같아요. 여러가지 대본을 놓고 검토했을 때 결국은 이쪽(작가주의 성향의 영화)을 선택하게 되더라구요. 배우로서의 출발 자체도 독립영화부터 시작했고, 이후 이창동 감독 만나서 '박하사탕' 찍고, 또 김기덕 감독 만나서 '섬' 찍고…. 돌이켜보면 거의 9년을 일관성 있게 이런 작업을 해온 것 같네요. 대중적인 영화 출연요? 하고 싶어요. 그동안 몇 번의 기회가 있긴 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못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잘 안 듣는 편이거든요."

 8일 개봉을 앞둔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영화 '경계'에서 여주인공인 탈북자 최순희 역을 맡은 서정과의 인터뷰는 1일 오후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목까지 덮은 검은색 니트에 검은색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지난해 6월부터 8월까지 두 달 반 동안 몽골 오지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거의 씻지를 않았어요. 물이 귀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워낙 건조해서 씻고 싶다는 생각도 안들었어요. 그래도 (워낙 건조해서 그런지) 사람들한테서 냄새가 하나도 안 나더라구요. 화장실요? 넓은 초원과 사막이 다 화장실이에요. 전 몽골의 화장실이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화장실인 것 같아요.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하늘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볼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이 어디에 또 있겠어요. 거기서 두 달 반 동안을 그렇게 지내다가 막상 서울에 오니까 앞뒤좌우 다 막힌 화장실이 답답하더라구요."

 서정이 연기한 최순희는 탈북하다가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 창호와 함께 내몽골의 오지에까지 이르게 된 불행한 여인이다.

   최순희 모자는 처자식을 대도시로 떠나보내고 내몽골 오지의 게르(몽골의 전통가옥)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몽골 남자 항가이(바트을지)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최순희는 엄청난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인물이에요. 탈북 과정에서 그가 겪은 깊은 고통과 상처는 최순희를 소리내어 웃을 수도, 울 수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는 건조하고 공허한 인물로 만들어버렸죠. 영화 속에서 최순희가 보여준 몽유병 증상도 그가 겪고 있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탈북자의 60% 정도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몽유병 증상을 보인다고 해요."

 몇 차례의 인상적인 정사신이 등장하는 영화 속에서 최순희는 자신에게 연정을 품은 항가이와의 관계를 완강히 거부하지만 항가이가 집을 떠난 사이 자신을 겁탈하려 했던 어린 몽골 군인에게 몸을 맡기며 마음의 장벽을 스스로 허무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바로 그 장면 때문에 '경계'라는 영화가 슬픈 영화인 것 같아요. 장 감독님은 그 장면을 통해 완강히 닫혀 있던 사람의 욕망이 일단 한번 열리게 되면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죠. 실제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탈북여성들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데 지치다보면 나중에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군인 중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지목하면서 '오늘은 차라리 저놈에게 당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가 된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슬픈 일이에요? 저 그 장면 찍고 나서 정말 서글퍼서 한참을 울었어요. 그냥 운 것도 아니고 꺼이꺼이 통곡하며 울었죠. 스태프들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왜 만날 상처 입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역할만 하느냐"는 우문(愚問)을 던져보았다.

   "다른 기자분도 그러더라구요. 왜 항상 오지에 가서 고생하는 어려운 역할을 하느냐고. 근데 제겐 그게 어려운 게 아니에요. 몽골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작업들이 제겐 큰 위로와 만족감을 줘요. 제게 주어진 그런 역할에 몰입함으로써 서정을 벗어날 수 있다는 데 대해서 굉장한 위안을 얻고 카타르시스도 느끼는 거죠. 제 일기장을 보면 매일매일 피곤하다. 피곤하다, 피곤하다는 표현이 끊이질 않는데, 그런 일상의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견디고 이겨나가는 방법이 제겐 영화예요. 누구에게나 탈출구나 해방구가 필요하지만 제겐 영화가 탈출구이자 해방구인 셈이죠."

 서정은 최순희 모자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제작 중인 장률 감독의 차기작 '이리'에 우정출연할 예정이다.

   "최순희 모자가 남한에 오게 된 뒤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이죠. 전북 이리가 배경이라서 영화 제목이 '이리'예요. 주연은 윤진서ㆍ하정우 씨고, 저는 '경계'에 출연한 인연으로 우정출연하는 거예요."

 우정출연하는 것 말고 '진짜' 차기작을 묻자 "정해지긴 했는데 제 입으로 밝히긴 어렵고 아마 제작사 쪽에서 홍보를 할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내용의 영화냐"고 재차 캐묻자 "접근하는 방식이 좀 다르긴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영화들과 크게 다르진 않다"며 웃었다.

   서정과 몽골 배우인 바트을지가 주연을 맡은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경계'는 8일 5개관 정도의 소규모로 개봉, 국내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