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한구 (수원대 경상대학장·객원논설위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

1941년 12월 8일 일본 전투기들에 진주만이 어이없이 기습공격을 당한 후 미국인들간에 자주 회자되었던 말이다.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자 하늘마저 청명해 진주만의 수많은 군인가족들은 한가로운 주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400여대의 일본 전투기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하늘을 뒤덮는가 싶더니 주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날 기습으로 미국은 전함 18대, 항공기 177대, 인명 2천403명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10년전 외환위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도 끔찍하다. 졸지에 실업자들이 무더기로 양산되면서 서민들의 심정은 공황 그 자체였다. 국내외 언론들은 연일 정부의 무능과 재벌들의 과욕에 화살을 퍼부어 댔으나 국민들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국가부도란 초유의 사태에 직면, 남을 비난할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오로지 난국타개만이 지상과제였다. 서민들은 맹목적이다시피 '금 모으기'운동에 참여했다. 훗날을 대비해서 애지중지 모셔두었던 금붙이를 자진 매각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기 돌잔치를 치른 직후에 선물로 받은 돌반지까지 들고 나오는 젊은 부부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16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 대부분은 향후 국민들이 두고두고 갚아야할 빚으로 남았다.

이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국부(國富)의 대부분이 외국자본의 수중에 넘어가면서 더 많은 직장인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구조조정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도 편치 못했다. 노동시장 유연화니 연봉제니 하면서 간단없이 근로자들을 옥죈 때문이다. 덕분에 비정규직 근로자수가 급증하고 분배구조는 더욱 악화되었다. 목하 근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주(社主) 눈치 보기 바쁘다. '6·25 이래 최대의 국난'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재벌들도 소나기를 피할 수 없었다. 대우그룹을 비롯한 30대 재벌의 3분의 1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으며 어렵사리 살아남은 재벌들에게는 모진 채찍질이 가해졌다. 차입경영, 문어발경영, 황제경영, 부당내부거래 및 분식회계, 편법상속, 정경유착 등의 해소요구가 그것이다. 재벌들은 차입규모를 줄이느라 금싸라기 같은 자산들을 헐값에 매각했으며 주력업종 위주의 슬림화작업을 병행했다. 정도경영, 윤리경영까지 강요받았다. 재벌들의 부채규모가 비상히 축소되었고 지주회사제로의 전환은 물론 투명경영까지 담보되었다.

국민들은 천문학적인 수업료를 지불한 만큼 고질적인 재벌문제들이 해소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그릇되었음을 확인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지난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으로 정권회수에 실패했다. 대다수 재벌들의 지배구조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지난번 SK와 두산그룹의 사례에서 확인되었듯이 일부 재벌들은 구태의연한 분식회계를 통해 회사돈을 불법으로 빼돌렸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은 그룹을 통째로 아들에 상속하기위해 부당내부거래를 시도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재벌들의 문어발경영은 더욱 심해졌다. 재벌들의 정(政), 관(官), 언(言) 커넥션은 더 교묘해지는 느낌이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재벌 오너들의 도덕적 해이는 도를 넘고 있다. 구태의연한 재벌들의 경영행태에 국민들은 황당함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낀다. 반재벌정서가 잦아들지 않는 이유이다.

이번에는 삼성그룹의 비리의혹이 불거졌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팔을 걷어붙인 터에 대선까지 겹쳐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되지 않는다. 더구나 외환위기 10돌이 코앞에 닥친 시점이어서 특히 그러하다.

일전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저명한 자동차품질 전문평가업체 JD 파워사의 제임스 파워 3세 전 회장은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기업으로 한 단계 도약하려면 가족과 친인척으로 구성된 현 경영구조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민들이 10년 전의 아픈 기억을 더 이상 떠올리지 않도록 재벌들은 스스로 구태(舊態)를 떨쳐 버려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