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우리가 남이가!'

지난 날, 어느 대통령이 내놓고 큰소리 친 말이다. 그전서부터 누구나 자주 쓰던 이 말이 그 뒤로 새삼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의 입길에 곧잘 오르내리기도 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발언은 물론 얼마든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동지나 동료들 또는 동학들의 합심이 나쁠 턱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남이가!'를 함부로 나무랄 수 만은 없다. 흉볼 수 만은 없다. 그 말로 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警句)가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 바로 그 말을 일방적으로 칭송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배타적인 뉘앙스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가 (내가) 알 게 뭐야!' '우리만 잘 어울리고 잘되면 그만이야. 남들이야 죽을 쑤든 밥을 굶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어'. 이런 따위 뜻도 거기 진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 그 말이 지닌 양지와 음지, 그건 원칙적으로는 반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 속에 껴들고 보면, 양지보다는 음지가 더 짙게 끼쳐져 있는 게 사실일 것 같다.

거리에서, 지하도 계단에서, 광장에서 또 슈퍼나 마트에서는 그 음지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면 과장일까?

도시의 횡단보도에서 좌우 통행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좁은 계단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무질서다. 앞에서 오고 있는 사람, 계단을 밟고는 마주 보고 오는 사람, 그들은 거의 안중에 없다. 나만 알아서 제 빨리 차고 나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서로 부딪치건, 상대방 앞을 가로지르건 전혀 무관심하다. 제 갈 길 제 멋대로 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공공건물의 문을 드나드는 풍경은 더 문제가 많다. 들고 나는 사람 가운데 자신을 양보하거나, 비켜서거나 하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신이 들어서려다 말고 안에서 나오는 상대방을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잡고는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적이다. 다들 제 깜냥대로다. 나만 있고 우리만 있고 남이 없다.

'남 그 따위 내가(우리가) 아랑곳할 게 뭐야!'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없이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온 사회에 오직 나뿐이고 다만 우리뿐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만 설치고 우리만 나부대는 곳에는 사회가 없다. 공중(公衆)은 없고 잡동사니 군중이나 어중이떠중이의 우중(愚衆)이 있을 뿐이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우리는 남과 더불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은 나나 우리의 기틀이고 터전이다. 남들이 없어지면 그 순간에 나도 유야무야하게 된다.

이럴 때, 당대의 대표적인 서구 철학자의 한 사람인 E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남은 또 다른 나고 나는 또 다른 남이다'.

그렇게 말했다. 나와 남이 따로 별 개 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거기 인간 윤리의 궁극이 있노라고 그는 역설했다. 그의 윤리는 동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 온 것처럼 부모 자식, 형제 자매, 어른 아이, 스승 제자 사이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윤리다. 나와 남, 우리와 남의 관계야말로 윤리다. 그 점을 우리는 레비나스에게서 배워도 좋을 것이다.

말로는 그래도 실제로는 어려워 할 것 없다. 횡단보도나 계단에서는 좌우 통행 지키면서 남을 비껴 가 보자. 어디든 좋다. 공공 건물의 문에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열린 문 한번쯤 잡고 서 있어 보자. 그러면서 '먼저 가시죠!' 말해 보자. 그걸로 우리 사회의 윤리는 환히 틔고 밝게 열릴 것이다. 내가 또 다른 남이 될 것이고 남이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드디어는 '남도 우리야!'

그렇게 따뜻하게 다사롭게 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