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춘 (언론인·전 고려대 석좌교수)
2차대전 이후 분단국가들 가운데 중국 베트남 남예멘 등은 통일문제를 공산당이나 정보기관에서 담당해 왔다.

반면 행정부에 독립된 부처(Ministry)를 두고 운영해 왔던 나라는 구 서독과 한국뿐이다. 서독은 1949년 건국후 전 독일성(省)을 두고 동서독간의 친척방문을 알선하는 한편 통일에 관한 연구와 동독에 관한 각종 정보와 자료의 수집활동을 맡겼다.

이것이 1969년 사회민주당의 빌리·브란트가 집권후 동방정책(Ostpolitik)을 시작하면서 명칭을 내독성(內獨省)으로 바꿨다.

서독은 동방정책을 두갈래로 추진했다. 즉 소련 및 동유럽공산국가들, 특히 동독과의 해빙 등 정치적 협상은 총리실이 주관했다.

이와달리 내독성은 가족과 친지방문, 문화 체육 학술 등의 인적교류, 그리고 교회 학교 시민단체간의 자매결연을 중개하여 화해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

1950년대 남한에서는 김일성의 기습남침에 의한 동족상잔의 악몽과 감정 때문에 북한하면 반공 멸공 승공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1960년을 분기점으로 나라안팎에서 대북한 완화기류가 한때 고개를 들었다.

5·16쿠데타로 다시 반공분위기가 됐으나 청와대에서 언젠가 있을지 모를 북한과의 대화및 국제적인 데탕트(화해) 분위기에 비해 통일관계 부처의 신설이 제기됐다.

드디어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이 발족했다. 직원 40여명으로 서울 장충동 자유센터안에 위치한 통일원은 북한 동향분석과 통일문제 연구가 주 업무였다. 통일원이 처음으로 한 일은 통일에 대한 국민의식조사로서 혹시나 동요할 것을 우려해 발표되지 않았다.

그 후 7·4남북성명, 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 이산가족상봉 총리회담 기본합의서를 완성하면서 통일원의 규모는 확대됐다. 북측과 각종 회담은 사실상 정보부-안기부가 주도했고 통일원은 거드는 역할이었다.

창설 후 지금까지 39년간 장관은 모두 33명, 평균 14개월씩 재임한 셈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지난주 발표한 정부조직개편안에서 통일부가 폐지된 것을 두고 정치권(圈) 및 전문가들 사이에 찬·반론이다. 인수위는 통일부를 외교통상부와 합쳐 외교통일부로 한다는 안이다.

이는 지금까지 북핵대응 등 대북정책의 방향을 두고 통일부와 외교부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대북정책을 대외정책의 기조에서 일관성 있게 추진한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당선인도 "대북정책을 통일부가 독점하던 때는 지나갔다. 각 부처와 관련되어 협력을 도모해야한다. 따라서 통일부를 없앤 게 아니라 보다 효과적인 대북정책의 추진을 위해 외교부와 합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대통합민주신당 등 야당과 일부 전문가들은 "통일부 폐지는 남북관계를 경직·악화시키는 후퇴조치다", "외교부와 1대1 통합이 아니라 해체 분해하여 일부만 흡수함으로써 대북정책의 추진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특히 북한은 노동당의 통일전선부와 내각의 외교부가 대남정책을 공조하고 있어 대응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폐지를 반대했다.

통일부 폐지안에 대해서는 "과거 서독의 총리실과 내독성의 2원화정책으로 가려는 것", "대북퍼주기 등 지나친 저자세 등을 시정하고 한미동맹을 보다 강화하겠다는 사인이 아니냐"는 등의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물론 기구와 기능을 축소·재조정해서라도 통일부 같은 대북전담기구는 존치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효율적인 대북정책을 위한 외교부와의 통합이라면 구체적인 기능과 역할 재조정·분담안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과 한나라당은 선거때 대북저자세, 북한의 핵·미사일을 내세운 식언과 말바꾸기, 무작정퍼주기식 정책을 과감히 시정하고 핵포기때 적극지원을 공약한 만큼 이를 구현시킬 수 있는 기구와 조직안을 만들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