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경희(숭실대교수·문학평론가)
지난 11일 새벽 숭례문이 전소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보 제1호를 불태우다니. 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숭례문이 복원된다고 해도 참혹하게 찢긴 국민적 자존심을 온전히 회복하긴 어려울 것이다. 방화범 채모씨가 구속되고 방화의 원인과 그에 대한 해석은 '사회에 대한 개인적 불만'과 '묻지마식 방화'로 결론지어졌다. 이로써 사건이 종결된 것일까?

숭례문 참사는 우리 사회의 병적 징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채씨의 행각을 개인적 불만에 의한 범죄행위라고 단순하게 치부할 일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그 원인이 된 것이다. 채씨는 범행 동기를 공권력이 자신의 재산을 억울하게 갈취해간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밝히고 있다. 공권력이 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었다 해도 채씨를 충분히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권력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그것은 때로 합법이라는 허울로 가장된 채 자행되곤 한다. 합법적 폭력 앞에서 개인은 더더욱 무력하다. 왜? 그야말로 합법이니까. 만일 합법적 폭력이 한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한(恨)을 남기고 그것이 복수의 불씨가 되었다면 국가가 국민을 범죄자로 만들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사례가 어디 채씨의 경우뿐이겠는가.

폭력은 폭력을 양산하고 한은 복수를 낳는다. 우리 문화와 예술의 동력이 한으로 설명될 때마다 나는 불편한 심정이 되곤 한다. 그리고 한의 승화를 역설하는 것을 볼 때마다 더더욱 불편한 심정이 되곤 한다. 승화가 쉬운 일인가? 그러한 설명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그다지도 한이 많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승화를 역설하기 이전에 애초부터 한 맺힐 일을 없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한은 억울함과 비통함의 지속적 내면화이다. 그 이면에는 견뎌내기 어려운 가학적 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범한 사람은 한을 승화시킬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채씨와 같은 폭력적 형태로 폭발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숭례문 참사를 지켜보았던 우리 모두는 과연 얼마나 건강한 내면을 지니고 있는가? 끊임없이 폭력이 자행되는 사회에서 폭력의 내면화는 불가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폭력을 경험한 자가 폭력에 대해 반성할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배울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어렵다. 일례로 '욕쟁이 할머니'에 대한 향수를 들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욕쟁이 할머니집'은 서민 취향을 반영한 맛있고 정겨운 음식점으로 인식되어 있다.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욕을 해대는 할머니에게 환호하며 음식과 술에 취하곤 한다. 욕을 먹으며 즐거워하다니! 이 무슨 마조히즘적 문화란 말인가. 이 기이한 외식(外食) 문화의 원조가 어디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 난립하는 수많은 욕쟁이 할머니는 이미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품일 뿐이다. 다만 거기서 불쾌함이 아니라 훈훈한 인간미를 느끼는 왜곡된 심리에 경악할 뿐이다. 내가 과민한 것인지 모르지만 매 맞아야 편해지는 마음이라면 그것 또한 폭력의 내면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와 이모들은 결코 욕쟁이 할머니와 같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얻고자 하는 마음의 위안과 정겨움 또한 이 같은 것에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채씨의 행위를 변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를 동정할 마음도 없다. 그는 마음이 병든 자이다. 만일 가학과 피학으로 물든 복수심에 의해 숭례문 참사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개인을 비난하는 차원 이상의 판단이 요구될 사항임을 강조하고 싶다. 문화재 보호와 재건도 중요하지만 폭력적 복수심으로 치닫는 인간 정서의 돌봄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나는 지금 폭력에 얼마만큼 동화되어 있는가? 진지하게 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