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껏 일본 것 베끼려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기술로 독자개발한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라.”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이 진대제 박사와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서 남긴 준엄한 유언이었다.

1985년 삼성은 256KD램을 겨우 만들고, 64KD램은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 회장이 반도체에다 돈을 쏟아부어 삼성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터다. 이 회장은 우여곡절끝에 'IBM의 동양천재 진대제 박사'를 삼성미국 현지법인으로 입사시킨뒤, 국내에 불러들일 수 있었다.

'진대제', 대한민국 국비유학생 제 1호가 되어 미국에 건너간 이 가난한 천재 청년은 메사추세츠주립대에서 올 A학점으로 박사시험에 통과하고, 다시 실리콘 밸리에 있는 스탠퍼드로 전학해 첫학기 말에 박사진입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연이어 83년 반도체연구계의 불가능이라던 '새 부리 성장현상'에 대한 물리적 설명을 할 수 있는 점성 유체모형을 만들어 박사논문을 발표, 세계를 깜짝 놀라게했다. 마침내는 IBM의 중심 왓슨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반도체에 관한 모든 경험의 과정을 섭렵했다고 판단, 삼성 미국 현지 법인 반도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왔던 터다.

그후 4년이 지나간 89년 10월 하순의 어느 일요일. 역사적이고 기적적인 완전동작 칩이 만들어졌다. '공돌이' 진대제가 삼성그룹의 명운은 물론, 한국이 세계 지식정보화사회를 이끌어갈 '미래 쌀'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병철 회장님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손톱만한 16MD램의 부가가치는 실로 엄청나, 무게 대비로는 금보다 훨씬 비싸게 팔렸다. 삼성은 잇달아 64MD램, 95년 256MD램, 97년 1GD램을 세계최초로 개발했고, 각종 메모리사업, 낸드 플래시메모리개발에도 성공했다. 삼성은 93년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매출 1위에 등극한 뒤부터 단 한번도 1등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 한국은 94년 반도체 한 품목만으로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고, 10년이 흐른 지금도 250억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은 이제 한국을 먹여살리고, 경제를 떠받치고, 한국을 대표하는 주력수출 품목이 됐다. 한국의 반도체 신화다.

진대제는 2000년 부채덩어리인 삼성전자의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직을 스스로 선택해 옮겼다. 그는 약속대로 대형 디지털 TV를 개발해 난공불락으로 여기던 소니의 아성을 깨뜨려 또한번 세계를 경악시켰다. 충격을 받은 소니가 회장과 관련사장을 사임시키고, 미국인 CEO하워드 스트링거를 영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가전부문 세계 최고 일본의 소니를 넘겨뜨린 것이다.
2003년 2월 삼성전자 진대제 사장은 정보통신부장관직에 올랐다. 그로서는 7만주의 삼성전자 스톡옵션, 지금의 가치로는 300억원을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그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추천한 인사중에는 이건희 회장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통부장관에 오른 진대제는 노무현 참여정부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세운 3년여동안 한국을 명실공히 세계최고의 IT강국으로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경제전쟁의 악조건 속에서 한국의 블루오션을 찾기 위해 IT839전략과 U-코리아 프로젝트를 수립, 세계최초로 와이브로(휴대인터넷)와 DMB 등을 개발했다.
진대제는 이제 경기도를 한국의 성장엔진, 세계 초일류 광역자치단체로 세우겠다는 기치를 내세워 4번째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