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혹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지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어찌 글쓰기뿐이랴. 자신이 택한 일에 몰두하여 시간의 흐름조차 잊는 것, 저물 무렵 일을 시작하여 길어야 30분 쯤 지났으리라 여겼는데 밝아오는 동쪽 창문에 깜짝 놀라는 것, 그것이 바로 매혹이다. 스무 살은 자신을 매혹시키는 일을 찾고 그 일에 온 몸 온 마음 바쳐 몰두하는 시절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불안이란 무엇일까.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문학청년 시절을 예로 들어보자. 밤을 꼬박 새워 쓰고 또 쓴 습작을 통해 카프카는 글쓰기가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를 알아버렸다. 오직 글만 쓰면서 하루를 한 해를 평생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열정을 다하여 글을 짓던 카프카도 늘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의 욕망에 필적할 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1912년 9월 22일 밤을 새워 '선고'란 단편을 완성하고는 "모든 것이 표현될 수 있을 듯하고, 큰 불이 준비되어 그 불 속에 모든 것, 가장 기이한 생각들조차도 불타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며 기뻐하는 카프카. 1914년 중편 '변신'을 완성한 후 "'변신'에 대하여 심한 혐오를 느낀다. 마지막 부분은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때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라며 극도의 불안을 드러내는 카프카. 프라하 출신의 섬세한 소설가는 과잉된 매혹과 과잉된 불안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갔다. 이 위험한 외줄타기가 젊음의 순수한 표정이고 현재까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은 성공을 향한 욕망이 큰 만큼 좌절로 인한 두려움도 깊고 자신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잦다. 과연 카프카가 '사업여행으로 방해를 받지 않았더라면' 탁월한 소설을 썼을까. 내 아버지가 조금 더 부자였더라면, 이 대학교가 아니라 저 대학교에 합격했더라면, 사사롭게 쓸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스무 살 젊은이는 좀 더 쉽게 불안을 이기고 좀 더 아득한 매혹으로 나아갔을까.
모리스 블랑쇼는 젊은 카프카의 변명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에게 이로운 상황이란 영원히 찾아들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전부 바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기의 시간을 글 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
스무 살 대학 새내기에게 불안과 매혹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외적인 변명 따윈 일찌감치 접고 일 그 자체가 내뿜는 매혹에 다가가는 것이다. 불안을 이기지 못해 일로부터 멀어지거나 자책하며 일을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도 처음부터 '지옥문'이나 '칼레의 시민'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발자크 평전'에서 츠바이크는 훗날 '인간희극'이라는 전대미문의 작품을 남기는 대작가의 보잘 것 없는 젊은 날을 꾸밈없이 전한다. "이 못된 젊은이의 재능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다! 학교마다 그는 벌 받는 자리에 있었고 라틴어는 32등이었다!"
불안과 매혹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안도 사라지고 매혹도 없는 일상이 100배는 더 위험하다. 미래의 안락을 정해두고 현재를 단지 그곳으로 가는 수단쯤으로 파악하는 삶이 1천배는 더 끔찍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서 매혹에 떨고 불안에 잠길 일이다.
갓 스물의 젊은이여! 불안한가?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라. 불안한가? 잠을 줄여 그대 일에 몰두하라, 즐겨라. 불안은 매혹의 어머니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