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웨이(My Way)'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등장한 패티 김(본명 김혜자ㆍ70).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출발해 59년 정식 가수로 데뷔한 후 음악인생 반세기를 맞았다.
24일 오전 서울 조선호텔 오키드룸에서 열린 패티 김 음악인생 50주년 기념 공연 '꿈의 여정 50년, 칸타빌레'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사회자로 나선 후배 유열이 소개하자 패티 김은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라며 탄탄한 라이브로 히트곡 '초우'의 한 소절을 선사했다.
"가수는 말보다 우선 노래를 해야 긴장이 풀립니다. 반갑습니다. 패티 김입니다."
그의 이번 50주년 투어는 전국 방방곡곡 50여 지역을 돌고 평양 공연과 월드 투어도 겸한다. 그는 특별히 평양 공연에 대한 강한 바람을 피력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란 노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불렸던 노래이기에, 아버지(함경도)와 어머니(개성)의 고향이 북이기에 더욱 간절한 듯 보였다.
"평양에서 제 독무대를 열고 싶어요. 조용필 씨도 좋은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죠. 북에도 제 노래를 아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기에 전국 투어 때 평양까지 꼭 가고 싶어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평양에서도 불리길 바랍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제 노래 '이별'이 '18번'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노래를 그분 앞에서 꼭 한번 불러야 하는데…(웃음)."
패티 김은 70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은 얼굴과 날씬한 몸매로 눈길을 끌었다. 유열은 "50주년이 아니라 30주년인 줄 알겠다"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자리에는 대한가수협회 임원인 정훈희, 최백호도 참석해 협회 명예회장의 50주년을 축하했다.

   4월26일 목포 시민문화체육회관에서 포문을 여는 50주년 공연은 4월30일~5월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5월10일 수원 야외음악당, 5월17일 대전 충남대 국제정심화홀, 5월30~31일 고양 아람누리 오페라하우스, 6월7~8일 부산 시민회관 대극장, 6월14일 여수 시민회관, 6월21일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9월20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 11월22~23일 성남 아트센터 등지를 돌며 열린다.

   또 평양을 거쳐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를 비롯해 2009년까지 월드 투어를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과 함께 선보일 50주년 기념 음반은 신곡과 리메이크곡으로 구성됐다.

   김희갑 작곡ㆍ양인자 작사의 '나의 노래', 하광훈 작사ㆍ작곡의 '내 친구여'가 신곡. 이광조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조용필의 '상처', 유익종의 '이연' 등 5곡과 자신의 히트곡 '빛과 그림자'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등 6곡을 새로이 편곡해 리메이크했다.

   다음은 패티 김과의 일문일답.

--음악인생 반세기를 맞은 소감은.


   ▲10년 전 40주년 공연 때 '나의 꿈과 목표'는 5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모르고 살기에 또다른 10년의 세월 동안 목숨 같은 음성에 변화라도 생기면 할 수 없지 않나. 내 자신을 단련하고 훈련시키며 오늘 이 자리를 맞게 됐다. 나로서는 참으로 감회가 깊다.

   해가 아침에 뜰 때는 아주 밝은데 멀리 떠 있어 작게 보인다. 해가 질 무렵에는 해가 10배 이상 커보이고 붉은 빛으로 이글이글 타오르며 천지를 물들인다. 지금 내가 그쯤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라톤 코스는 42.195㎞다. 7~8㎞를 남겨두고 선두에서 뛰면 그 사람이 승리자로 거의 확정된다. 그 선수가 박수를 받으며 경기장 입구를 들어서는 찰나,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다. 소도시 공연 때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정도로 열광하는 모습에 '왜 진작 안 갔을까' 후회했고 이번에 소도시를 찾는다.

   --제작발표회장인 조선호텔이 의미가 깊은 장소라고 들었다.

   ▲1958년 늦여름 미8군 무대를 시작으로 활동했다. 그때는 (가수가 되기 전) 훈련 기간이었다. 1959년 정식 가수가 돼 1~2년 트럭을 타고 한국에 주둔한 장병들의 위문공연을 방방곡곡 다녔다. 이때 외교관과 장교급 이상이 모이는 조선호텔 사교클럽에 전속 가수로 발탁돼 노래했다.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걸 본 미군 방송 중역이 일본 진출을 주선해줬다. 그래서 1960년 12월 일본 NHK의 초청을 받고 공연했다.

   --50주년 공연은 어떻게 구성되나.

   ▲40주년 공연을 제외하고 원래 게스트 없이 노래하는데 이번에는 이문세, 이승철, 신승훈, 팝페라 가수 임태경, 국악인 오정해 씨가 함께 한다. 또 무대에서 내가 처음 시도하는 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처음 등장이니까 절대 늦게 오시면 안된다. 공연 후 새 음반 팬 사인회도 갖는다.

--대중가수로는 처음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했고 미국 뉴욕 카네기홀,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무대에도 올랐다. 늘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만큼 개척자로서의 고충도 있었을 텐데.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일본에 맨 처음 갔을 때다. 그때는 한국인이 '강고쿠진'이 아니라 '조센진'이라고 불릴 때다. 이때 일본에서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이들을 이기는 길은 노래를 잘하는 것이었고 열심히 노래했다. 더 키가 더 커보이려고 높은 구두를 신고 머리도 일부러 높게 올렸다. 앉을 수조차 없는 몸에 꼭 맞는 의상을 입고 '빅 S라인'으로 일본 연예인과 맞섰다(웃음).

   1963년 초 미국에 갔다. 식당, 화장실, 버스정류장 어디를 가도 화이트, 블랙이라고 쓰여 있을 때다. 인종차별이 심한 상황에서 동양 여가수가 라스베이거스와 뉴욕에서 일하는 것은 무척 서러운 일이었고 힘들었다. 최초, 개척자는 너무나 힘든 과정을 겪는다. 나는 그때 길을 만들어가며 걸어갔다. 지금의 후배들은 아스팔트로 정리된 길을 자가용 타고 달리고 있다. 그러나 꿈과 열정을 잃지 않았고 그 결과 당시 팬들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를 데리고 공연장을 찾아온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자신에게 혹독할 정도로 관리한다. 운동은 내 삶의 일부가 됐다. 일주일에 5일을 걷는다.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호흡이기에 수영은 기본이 1천m, 힘이 나는 날은 2천m를 쉬지 않고 한다. 또 일주일에 월수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전에 한 시간반씩 요가를 한다. 식사 조절도 하는데 약간 배고프면서 산다. (본명) 김혜자는 패티 김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손해 보며 살아왔다.

   --오랜 시간 노래하며 마음이 허물어진 순간에는 어떻게 다잡았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 음악이다. 두 가지가 없으면 내겐 죽음이다. 남편과 딸들의 지원이 고맙다. 또 내게는 노래가 힘이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50주년 공연은 후배 가수들의 귀감이 된다.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내가 시작했을 때와 연예계의 흐름이 너무 바뀌었다. 가수는 첫째 노래를 잘하고 무대에서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유행이 바뀌듯 음악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가 내게는 탐탁지 않다. 나는 운명적으로 노래했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고 싶다. 그런 각오와 열정 없이는 10년, 20년 노래하기 힘들다. 요즘은 너무 인기, 돈벌이에 치중하는 것 같다. 가요사 한 페이지에 남으려면 무대가 생명이어야 한다. 그런 후배를 많이 보지 못해 안타깝다.

   --비와 셀린 디온의 공연장을 찾아 놀랐다. 다른 가수의 공연장을 자주 찾는 이유가 있나.

   ▲나는 외국에서 활동할 때도 기회가 있으면 다른 가수의 공연을 봤다. 한두 가지는 꼭 배우고 나온다. 비의 공연을 보니 역시 젊은 친구가 잘하더라. 춤도 잘 췄다. 후회되는 건 나도 젊은 시절 춤 좀 배워둘 걸 하는 것이었다(웃음).

   --대한가수협회 명예회장이다. 음악 시장 불황 속에서 가수들이 어떻게 단결하고 노력해야 할까.

▲연극, 영화, 무용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주연 외에도) 감독, 연출자, 조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수는 악보, 피아노 하나만 있어도 노래할 수 있다. 내 바로 밑에 후배들이 나서 협회를 만들게 돼 대단히 기뻤다. 힘이 닫는 데까지 얼마든지 봉사할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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