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정식(사회부차장)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었던 밀폐된 엘리베이터 안. 낯선 어른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하던 10살 초등생이 느꼈을 극심한 공포심을 떠올리면 지금도 살이 떨린다.

머리채를 쥐어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우악스런 손길에서 벗어나기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채 동영상만 지켜 보고 있는 나 자신의 무력감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무력감은 비단 필자 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CCTV를 통해 내 딸, 내 손녀, 내 동생이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을 본 시민 모두의 공통 감정이었고 이 감정은 늑장수사를 한 경찰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특히 경찰의 수사를 기다리다 못한 피해 초등생 아버지와 주민들이 범인의 얼굴이 찍힌 CCTV를 근거로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는 대목에선 더이상의 할 말도 잃었다. 다행히 범인은 방송과 신문이 그의 극악무도한 범행과 경찰의 늑장대응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다음날 바로 경찰에 붙잡혔다. 진작 경찰이 이런 노력을 다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범인의 구속으로 사건은 이제 마무리 되어 가는 듯 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에 많은 상처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

너무나도 어리고 여린 혜진·예슬이가 잔인한 성인 남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충격적인 사건 이후 또다시 벌어진 고양 초등생납치미수 사건을 통해 '더이상 우리 아이도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감이 한국사회를 뒤덮었다.

몇년전 아동성범죄자들에 대한 정신분석과 치료 방법 등을 물어 보기위해 한 대학병원의 정신과 전문의를 만난 적이 있다. '아동성범죄자의 재범률이 유독 높은 이유는 뭔지, 아동성범죄자의 경우 대부분 어릴적 고통스런 경험이 성장과정에 영향을 미쳐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강력한 처벌보다는 정신과 치료를 통해 이들을 선도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 의사는 너무나도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속에 선명하다.

"정신과치료가 만능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됩니다. 아동성범죄자의 재범률이 높은 것은 정상적인 성관계에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들의 범죄는 무형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기호일 뿐"이라며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너무나 충격적인 답변이라 기사에는 싣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오래된 경험과 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에서 나온 대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부 지방자치단체들은 발빠르게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겠다며 대안을 내놓고 있다. 정부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자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가칭 '혜진·예슬법'을 추진키로 했다고 한다.

혜진·예슬양의 죽음과 10살 초등생의 안타까운 발버둥이 더이상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모든 대안들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